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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Sep 19. 2023

가을 사과 한 입

가을. 그리고 내가 쓰는 소설 이야기.  

일어나자마자 인터넷 마트에서 배송시킨 신선식품을 정리한다.


빠알간 사과. 홍로가 주방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탐스러운 빛깔을 머금고 있다.

여름동안 썸머킹 같은 푸른 사과만 보다가, 가을이 오면서 점점 붉은빛을 띠는 사과를 보니 가을이 내 마음에 스며든다.  


과일 세척제에 뽀드득. 뽀드득. 사과를 씻어 과도로 얌전히 4등분을 한다. 작은 하얀 도자기 그릇에 담아 먹노라니, 사과가 귀족같이 보인다. 빨간 드레스에 하얀 도자기 구두를 신고 정갈한 속내를 보이는 가을 사과. 한 입 베어무니 퍼석퍼석한 게, 겨울 사과의 아삭함에 이르려면 좀 더 과수원에서 가을 햇빛을 받아야 되겠구나- 먼 곳의 과수원 나무에 달린 그 사과에 대한 기다림을 일깨워준다.


이 맘 때쯤 봄이 오면 길에서 들려오는 벚꽃 엔딩처럼, 내 고막에 아이유의 가을 아침을 초대한다.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춰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할까 말까 음~


서정적인 시 같은 가사에 고운 아이유 목소리가 가을을 한 뼘 더 데려와준다. 멋진 가을 아침이다.


하늘이 점점 파래진다. 여름 하늘과 다르다. 설명할 수 없는데, 우리는 모두 안다. 가을 하늘은 여름 하늘과 다르다. 가을 햇빛은 여름 햇빛과 다르다. 가을 공기는 여름 공기와 다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여름을 그리고 다가오는 가을을.


올려다본 하늘에는 뭉개 구름이 있다. 귀여운 말티즈를 한껏 손으로 부벼주면 만날 것 같은 하얀 엉클어진 모양의 구름이 있다. 좀 더 나가서 본 하늘에는 흰 구름 사이로 강아지 한 마리가 지나간 듯 홀(hole)이 생긴 구름이 있다. 어쩌면 오늘 무지개다리를 건넌 강아지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강아지가 남긴 흔적이 명랑하여, 헤어진 주인이 이 하늘을, 이 구름을 본다면, 우리 아이가 더 넓은 하늘에서 뛰놀고 있구나 안심할 것 같다.


어제- 오늘 나는 기묘한 체험을 했다. 예전에 신문 인터뷰에서 어느 소설가가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과 대화를 하고 만난다고 했는데,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꿈 하나를 어떤 얘기로 풀어내야겠다 생각했는데, 어젯밤 집에 들어오는 엘리베이터에서 그 소설의 주인공이 나에게 말했다. "난 이유리야."


그 즉시 집에 와 노트북을 켜고 소설의 첫 문장을 썼다. 나에게 말한 그대로-"나는 이유리다" 그렇게 옮겨 적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와 닮은 듯 다른 이유리의 이야기를 썼다. 오늘 아침에도 소설 첫 편에 쓴 노래들을 들으며 빠알간 사과를 보는데. 이유리가 말했다. "안녕?"


그리고는 이유리는 나에게 정말 수많은 얘기를 한꺼번에 폭탄처럼 쏟아내었다. 사과를 뽀드득. 뽀드득. 씻으며, 그 친구를 모두에게 사랑받는 친구가 되게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 친구가 생각보다 말이 많았던 관계로 한 편으로 끝내려던 그 소설은 몇 편을 더 쓰게 될 것 같다.


요새 나는 예민해져서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만남을 주의하고 있다. 말을 듣는 나도, 말을 하는 나도 다 날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유리.라는 친구가 나에게는 특별해졌다. 이 친구에게는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다. 얘기하는 게 참 재미있다. 아마도 내 머릿속이 내 마음이 떠올려낸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이 친구 얘기를 쓰면서- 글을 다쓰고 나서 처음으로 진짜로 소리내어 웃음이 났다. "우헤헤헤." 그냥 이 친구가 재밌었다. 이 친구를 내가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 화면으로 나오게 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뭣보다-그냥 재밌었다. 그래서 좀 더 유쾌하게 만나보려 한다. 우헤헤헤.


나는 소설을 꼭 써보고 싶었다. 근데 내가 아닌 사람을 만들어 내서 스토리를 짠다는 게 이해도 안 되고, 어떻게 하지 싶었다. 근데 그게 가능해지는 마법이 나에게 일어났다. 깊어지는 가을 밤이, 잔잔하지만 농익은 가을 햇빛이, 빠알간 사과 한입에 행복한 가을 아침이 나에게 주어진 선물의 리본을 풀러 주었다.


그래서 즐겁게 그 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이 가을. 빠알간 사과 한 입. 그리고 그러한 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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