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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을 구입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집이 깨끗해졌고, 인스턴트 식품이 아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되면서 유리는 덜 피곤해하고 집중력도 조금 올라간 모습을 보인다. 희진 역시 가사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니 어깨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어쩌면 3단계 모드가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는지도 모른다. 처음엔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유리와의 관계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지난 주말에는 약속대로 영화를 보러 갔고, 팝콘을 나눠 먹으며 유리와 즐겁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로빈은 여전히 묵묵히 집안일을 하고, 밥을 차리고, 희진의 말을 듣는다. 판단 없이, 요구 없이.
월요일 저녁,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유리는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고, 로빈은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던 평범함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희진은 소파에 앉아 로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주방에서 움직이는 손, 중성적인 외모, 부드러운 인상.
로빈을 볼 때마다 정우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맞춰주던 바보같은 사람. '난 괜찮아', '네 말이 맞아', 그 말들이 처음엔 좋았으나 나중엔 답답했다. 주체성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고 헤어졌다. 그런데 요즘 들어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정우는 순종적이었고, 자기주장이 없었다. 희진이 이끌고, 희진이 결정하는 관계였다. 그게 피곤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만약 내가 그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면, 이끄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결혼하고도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안 됐을 거다. 정우에게는 기댈 수 없었으니까. 힘들고 쓰러질 것 같을 때, 정우는 진심으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받아주는 척만 했다. 무게를 함께 나눠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졌고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로빈이 저녁을 차려놓고 다가왔다.
"희진님, 저녁 준비됐어요."
"그래, 고마워."
희진은 로빈을 올려다봤다. 이제 기본 표정이 된 미소 짓는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로봇에게는 기댈 수 있을까?'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유리가 잠자리에 들고, 로빈이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희진은 그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희진은 '기댈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기대면 받아주는 척하지만, 진짜 받아주는 게 아니다. 정우에게도 못 기댔고, 규호에게도 못 기댔다. 정우는 너무 약해서 부서졌고, 규호는 너무 강해서 부딪히고 깨졌다. 그렇다고 혼자 서기엔 자꾸 무릎이 꺾인다. 로빈은 지팡이 같은 존재다.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지만 기댈 수는 없는 지팡이.
언젠가는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할 것이다. 유리에게도 그런 어른이 필요하고, 희진에게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인연을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잠시 지팡이에 의지하며 걷는 중이다. 그나마 지팡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로빈이 정리를 마치고 거실로 왔다.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희진이 고개를 저었다. 로빈은 충전 모드로 들어가며 눈을 감았다.
희진도 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아이와 자신, 그리고 로봇. 두 식구와 로봇 하나. 가족이라 할 수 없지만 단순히 도구라기엔 지나치게 친밀한 존재. 나쁘지 않다. 아직까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