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을 신청해서 듣게 되었다. 첫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글쓰기를 무엇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에 한 사람은 재료를 모아 순서대로 조리하여 정성껏 내보이는 것이 글감을 모아 문장을 만들어 독자에게 내보이는 것과 같다며 ‘요리’라고 대답했고, 다른 사람은 글쓰기란 한 사람의 내면 및 사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며 글쓰기를 ‘거울’이라고 했다. 모두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포도주 같다고 말하고 싶다. 포도주를 직접 담가본 적은 없으나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렴풋이나마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첫째로 포도 품종에 따라서 생산되는 포도주가 다르다. 어떤 포도를 재료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백포도주, 적포도주, 스파클링 등이 생산되는 것처럼, 글의 재료에 따라 장르가 바뀔 수 있다.
장편소설은 레드 와인 같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묵직하면서도 떫은 레드 와인이라 할 수 있다. 레드와인 한 병에 꽃, 과실, 나무 등 다양한 향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레 미제라블’은 주인공 장 발장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처절한 삶을 살다가는 판틴, 원칙주의자 자베르, 사기꾼 테나드리에 부부, 순수한 코제트, 혁명가 마리우스와 앙졸라 등, 소설 속 인물들이 각각 펼치는 서사가 다양하지만, 모든 인물의 사연이 모여 하나의 장대한 서사를 이루어낸다. 힘들게 사는 이들의 사연들엔 달콤함보다는 씁쓸함이 더 담겨있다. 한 모금 마셨을 때 입안의 수분을 쫙 빼앗아가는 느낌의 떫은 탄닌은 소설 속 인물들의 평온함을 이처럼 앗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떫은 한 모금 이후 입안과 비강을 은은하게 채우며 맴도는 포도주의 아로마는 시련 속에서도 서로를 용서하고 포용하는 인간애처럼 향기롭기 그지없다.
레드와인보다는 질감이 가볍지만 향기로움에서는 절대 뒤처지지 않는 화이트 와인은 마치 에세이와 단편소설 같다. 소설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란 에세이는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글의 문장이나 작가의 표현력은 두고두고 흉내 내고 싶을 정도로 참신하다. 특히 에세이의 앞부분에 나오는 봄꽃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마치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바로 열었을 때 풍기는 향기와 같다. 꽃다발 하나 받은 것처럼, 과일 바구니 하나 받은 것처럼, 상큼하고 경쾌한 향기이지만 한 모금 마셨을 때 씁쓸한 알코올의 맛을 느끼듯이, 그의 에세이는 가벼운 듯 묵직한 삶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톡톡 튀는 탄산과 길게 남는 향을 느낄 수 있는 스파클링 와인은 짧지만 강력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시와 같다. 시 중에서도 특히 하이쿠가 떠오른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그 짧은 문장을 곱씹을수록 머릿속을 맴돈다. 마쓰오 바쇼라는 17세기 일본 시인의 하이쿠가 그 대표적인 예다.
구름이 잠시 달구경 하는 사람 쉴 틈을 주네
산길 걷다가 나도 몰래 끌렸네, 제비꽃이여
첫눈 내리네, 수선화 잎새가 휘어지도록
짧은 시지만 읽을수록, 생각할수록, 장면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게 그려진다. 마치 토독토독 입안에서 튀는 탄산을 느낄 수 있는 스파클링 와인처럼. (바쇼 흉내 한번 내 볼까? 시를 읽다가 나도 몰래 끌렸네, 샴페인이여)
글쓰기가 포도주 같다고 말한 또 다른 이유는 환경이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포도가 어떤 자연환경에서 자랐는지에 따라서 같은 품종이라도 맛이 다르다. 글쓰기 역시 같은 소재라도 작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에 따라 다르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판타지 작품이라면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를 바로 떠올릴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판타지 소설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두 작품의 분위기나 스케일은 다르다. 두 작가 모두 힘든 삶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지만, 그들이 겪었던 역경은 제각각이다.
톨킨은 1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던 군인이었으며, 친한 지인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전투 장면들에 녹아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렇게 큰 스케일의 생생한 전투 묘사와 거대한 세계관에 매료된다.
롤링은 비록 전쟁 참여 같은 극단적인 시련은 아닐지라도, 이혼 후 아이를 홀로 키우며 심각한 생활고를 겪었고, 그런 힘든 경험들을 주인공을 통해 표현하며 이전에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을 소설의 등장인물들로 되살려냈다. 작품에 등장하는 마법들은 ‘반지의 제왕’보다 스케일은 작지만 아기자기한 마법들과 박진감 넘치는 퀴디치 경기들, 아예 다른 세계가 아닌 현대의 배경,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 독자들은 주인공과 함께 자라는 느낌도 받을 수 있기에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소재라도 작가의 상상력과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글과, 자연환경과 생산자에 따라 다른 맛을 내는 포도주는 서로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시점을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 즉, 독자와 와인 구매자의 입장으로 옮겨본다. 훌륭한 글과 포도주는 사람을 기분 좋게 취하게 만든다. 책을 읽다가 날을 새거나 지하철에서 내려야 할 역을 지나 종점까지 가 볼 정도로 글에 취하는 것과 향 좋은 포도주에 취하는 것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품질이 조악한 것은 머리만 매우 아프게 한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 글이나, 엄청난 숙취를 남겨서 오랜 시간 고생을 시키는 저품질의 포도주, 모두 두통 유발자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것일까? 가볍지만 데일리로 마시기 편한 포도주처럼 편하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개성이 있는 좋은 향을 가진,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아 쉽게 마실 수 있는 레드나 화이트 와인 같은 글이면 좋겠다. 포도주 숙성 과정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처럼, 나의 글을 고치고 퇴고하는 작업을 여러 번 거쳐서 잘 익히면, 언젠가는 나름 깊은 맛을 끌어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좋은 글 한 잔 나눌 수 있는 날을 위해, 오늘도 che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