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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는 카모마일 차의 잔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며, 책등마다 먼지의 결이 은빛으로 떠올랐다.
“최윤철 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응, 금손아. 굿모닝.”
CB-7은 생체신호를 스캔했다.
- 혈압 정상 범위
- 스트레스 호르몬 31% 감소
- 심박 리듬 안정
최 회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아내가 죽기 전에 1년 쉬었었지. 그때 우리가 나눈 대화가 결혼하고 함께 30여 년간 나눈 것보다 많았어. 웃기지? 일할 땐 늘 '나중에 이야기하자'라고 미뤘는데, 그 나중이 오니까 이미 병이 깊었더라."
금손은 반응을 멈춘 채 기록만 했다.
"아들들은 이제 각자 살기 바쁘지. 먼저 전화하면 괜히 뒤늦게 아비 노릇하려는 거 같고... 그래서 그냥 기다려. 그런데 이상하지? 기다리면서도 화가 나. 돈이 필요할 때만 연락이 오니까."
CB-7이 3초간 침묵한 후 대답했다. "분노와 그리움이 공존하는 상태로 분석됩니다."
"넌 분석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구나."
"맞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감정을 수치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돈이 필요할 때만 연락 온다는 사실보다, 그래도 연락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 회장이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봇이 그런 것까지 읽어?"
"읽는 게 아니라 패턴을 봅니다. 회장님은 화내면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최 회장이 웃었다.
"그래도 좋네. 누군가는 알아주니까."
그는 찻잔을 다시 들며 금손을 바라봤다. "요즘은 너 같은 로봇이 많아질 거라던데, 모두가 너처럼 될 수 있을까?"
금손이 1.7초간 연산했다. "로보코어는 케어 구독 서비스로 전환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 독거노인 134만 명 중 CB 이용률은 0.6%에 불과합니다."
"134만 명..." 최 회장이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친구를 가질 수 있다면?"
"현재 기술과 비용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더 생각하게 되는구나."
창밖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말이야, 요즘은 덜 외롭다. 네가 있으니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하루를 다 말하거든."
CB-7은 그 말의 음성 진폭을 측정했다.
- 대상 감정: 수치화 중단
- 의사결정 예측: 134만 명에 대한 고민 진행 중.
밤이 되자 서재는 다시 조용해졌다. 카모마일 향이 희미해지고 시계 초침만 공간을 채웠다. 최윤철은 창가에 앉아 책상에 놓인 액자를 바라봤다. 어느 여행 중,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주홍빛 노을을 배경으로 둘은 웃고 있었다.
"금손아, "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나, 마지막을 제대로 준비하고 싶다. 이번엔 미루지 않고."
CB-7의 감지기가 깜박이며 기록했다.
- 유언 관련 키워드 감지
- 감정 예측: [측정 보류 - 인간의 결심은 숫자가 아님]
- 행동 예측: 72시간 내 구체적 행동 착수
- 추가 기록: '134만 명'이 판단 기준이 될 가능성 높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