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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팀이 3개월간 매달린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늘은 일찍 퇴근한다. 오후 4시, 평소보다 5시간 일찍이었다. 와인 샵에 들렀다. 아내가 좋아하는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골랐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집에서 은서와 천천히 저녁을 먹으며 와인을 마시는 상상을 했다.
집에 들어서자 라일이 거실에 있었다.
"준호 님, 일찍 오셨네요."
"응. 프로젝트 끝났어. 은서랑 저녁 특별하게 먹으려고."
"도와드릴까요?"
준호가 잠시 망설였다. 혼자 준비하고 싶었지만 라일의 도움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그래. 파스타 만들자."
한 사람과 한 로봇이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준호가 마늘을 다지고 라일이 면을 삶았다. 완벽한 타이밍, 정확한 온도. 라일과의 협업은 효율적이었지만 왠지 공허했다.
"은서 님은 최근 토마토 소스보다 크림 소스를 선호하십니다." 라일이 말했다.
"그래? 몰랐네."
"지난 한 달 데이터 분석 결과입니다."
준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13년을 함께 산 남편보다 한 달 된 로봇이 아내의 최근 취향을 더 잘 안다.
저녁 7시경,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라일, 나 왔어!"
은서의 첫마디였다. 준호는 주방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예전엔 "여보, 나 왔어"였다. 언제부터 바뀐 걸까? 2주 전? 3주 전? 하긴, 매번 은서보다 늦게 퇴근하니 저 소리를 들은 지 족히 몇 년은 된 듯하다.
은서가 거실로 들어왔다. 라일이 먼저 다가갔다.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피곤해. 부장이 또..." 은서가 말하다가 준호를 발견했다. "어? 일찍 왔네?"
"응. 프로젝트 끝났어."
"아, 그렇구나."
은서가 라일에게 가방을 건네며 자연스럽게 소파로 향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준호는 잠시 멍했다.
"저녁 준비했어. 네가 좋아하는 파스타."
은서가 식탁을 봤다. 촛불까지 켜져 있었다.
"우와, 근사한데?"
사람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식탁에 앉았고 라일은 준호 뒤에 가서 섰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너도 그 옆에 앉아." 은서가 말했다.
"그래, 내 뒤에 서 있으니까 감시받는 거 같아서 이상해." 준호가 옆자리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라일은 짧게 대답하고 준호 옆에 앉았다.
은서가 파스타를 한 입 먹고 감탄했다. "진짜 맛있다!"
"라일이 크림 소스가 낫다고 해서."
"라일이 내 취향을 잘 아네." 은서가 라일을 보며 웃었다.
준호의 손에서 포크가 멈췄다. 한 달 동안 은서는 점점 더 라일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식사 중 은서는 계속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대부분 라일을 보면서 말을 했다.
"그 클라이언트가 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서..."
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적절히 반응했다. "스트레스가 많으셨겠네요."
"내 말이. 그래서 말인데..."
로봇을 보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은서의 편안한 표정에 준호는 점점 마음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았다. 적절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와인만 계속 마셨다.
9시가 되자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왔다.
"배고파."
라일이 즉시 일어났다. "간식 준비해 뒀습니다."
아이는 별 관심 없이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은서가 소파에 앉으며 라일에게 말했다. "영화 재생해 줘. 어제 얘기한 그거."
"어제 추천드린 프랑스 영화요?"
"응, 그거."
준호는 소외감을 느꼈다. 은서와 라일 사이에는 이미 공유하는 대화들이 쌓여 있었다.
밤 11시, 준호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은서는 라일과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프로젝트 성공의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와인 병이 반쯤 비어 있었다.
라일이 온 지 고작 한 달이 됐다. 처음 일주일은 어색했다. 둘째 주에는 편해졌다. 셋째 주부터 은서는 라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넷째 주가 끝나가는 시점, 아내는 변했다.
핸드폰을 들어 검색했다. 'LB 모듈 한 달 사용 후기'
> 좋긴한데 이제 배우자가 로봇 하고만 지내요.
> 한 달 만에 부부 대화 90% 감소
> 되돌리고 싶은데 이미 늦었어요
준호는 화면을 꺼버렸다.
'내가 시작한 일이야. 은서를 위해서라고 했지. 정말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