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로봇 LB-04 (1)

100-86

by 매그넘

밤 10시 반, 정희진이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이 어지러웠다. 교복 가방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과자 봉지가 테이블 위에 뜯어져 있었다. 싱크대에는 라면 냄비가 물에 불어 있었다. TV가 켜져 있었고, 소파에 유리가 외출복 입은 채로 웅크려 자고 있었다. 혼자 라면 끓여 먹고, 혼자 TV 보다가, 혼자 잠들었다.


희진은 유리를 깨우지 않고 담요를 덮어줬다. 방으로 옮기기엔 너무 피곤했다. 싱크대의 라면 냄비를 씻으면서 내일 아침 회의 자료를 떠올렸다. 빨래도 돌려야 하고, 유리 학원비도 이체해야 한다. 전부 처리하려면 새벽 2시는 넘을 것이다.


이혼한 지 2년,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유리는 희진이 키우고 있다. 전 남편은 양육비를 보내지만, 그게 전부다. 유리는 아빠 이야기를 잘 안 한다. 희진도 묻지 않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뻐근한 목덜미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TV 화면을 멍하니 봤다. TV에서 로보코어 4세대 HB-9의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 로봇이 요리하고, 빨래를 개고, 아이에게 도시락을 건네는 장면이 지나가며 슬로건이 떴다.


"한 집에 최소 한 대. 아이와 당신을 지켜주는 두 번째 어른."


두 번째 어른.


희진은 어지러운 자기 거실을 둘러봤다. 과자 부스러기와 봉지, 널브러진 가방과 흩어진 책, 사막의 회전초처럼 굴러다니는 머리카락과 먼지 덩어리.. 화면 속 거실과 정반대였다.


유리가 눈을 떴다.


"엄마 왔어?"

"응. 왜 방에 안 들어가고 여기서 자?"

"기다렸지..."

유리가 말끝을 흐렸다. 희진은 유리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밥은?"

"라면 먹었어."

"숙제는?"

"했어. 학원에서."


TV에서 여전히 로보코어 광고가 흘러나왔다. 유리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진이 무심코 물었다.

"유리야, 우리도 로봇 들일까?"


유리가 희진을 바라봤다. 눈이 커졌다.

"진짜?"

"서연이네도 있다며. 밥 해주고 청소해 주는 거."

"응, 서연이는 학원 끝나고 가면 로봇이 밥 차려준대."


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는다. 따뜻한 밥은 주말에나 먹는다.

"엄마가 생각해 볼게. 얼른 들어가서 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 1시. 희진은 노트북을 열고 로보코어 공식몰에 접속했다. HB-9 본체, 4세대 최신형.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믿기 힘든 사람 도우미를 부르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능 목록을 읽었다. 요리, 청소, 빨래, 정리정돈, 음성 메시지 전달 등.. 그러나 아동 정서 교감 기능은 NB 전용이며 HB는 성인 사용자 중심이다. 그 아래 옵션이 있었다.


LB 모듈 추가 - 정서적 동반자 기능 (성인 전용)


손이 멈췄다. LB는 외로운 사람들의 대안이라고 알고 있다. 희진은 본인은 외롭지 않고 그냥 바쁜 거라고 생각했지만 손은 이미 'LB 모듈 포함'을 클릭했다.


'안 쓰면 되지. 일단 HB로만 쓰면 돼.'


결제 버튼을 눌렀다. 배송 예정일은 3일 후다.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두 번째 어른'이라는 TV 광고의 슬로건이 머릿속을 맴돈다.


'지금 이 집에는 나 말고 어른이 필요해. 로봇이 과연 어른의 역할을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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