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로봇 LB-04 (2)

100-87

by 매그넘

토요일 오후, 로보코어에서 HB를 인계했다. 유리가 현관에서 뛰어왔다.

"엄마, 로봇 왔어!"


함께 거실로 로봇을 '모셔'왔다. 4세대 기본 외피, 중성적인 얼굴, 짧은 머리, 부드러운 인상. 남자도 여자도 아닌 느낌이었다. 유리가 로봇을 빤히 쳐다봤다.


"생각보다 많이 사람 같다."

"그렇지?"

"이름을 뭐라고 할까?"

"글쎄, 유리가 한번 지어볼래?"

"로봇.. 로비? 로빈? 로빈 어때?"

"로빈 좋다."


전원을 켜자 눈이 떠졌다.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진짜 눈동자처럼 보였다. 4세대는 확실히 달랐다.

"안녕하세요. HB-9입니다. 초기 설정을 시작합니다."


태블릿을 가져와 세부 설정을 시작했다. 유리는 옆에서 구경하다가 금방 지루해져서 방으로 들어갔다. 희진 혼자 설정을 이어갔다. 대화 스타일은 부드럽게, 의견 제시 빈도는 낮게, 등등.. 목소리 톤을 고르는 단계에서 손이 멈췄다. 샘플 음성을 들어봤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와 부드럽게 맞장구치는 말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현정우. 희진의 첫사랑이었던 전 남자친구.

'응, 네가 맞아', '너 원하는 대로 해', '난 괜찮아, 넌 어때?'


3년 사귀다 헤어졌다. 착하고 순했다. 다 맞춰줬다. 처음엔 편했는데, 나중엔 답답했다. '네 생각은 뭔데?'라고 물으면 '네가 원하는 거'만 반복했다. 주체성 없는 사람이라 결론 내리고 끝냈다.


지금 이 설정값들.. 부드럽게, 의견 제시 낮음, 동의 우선, 등.. 전부 정우랑 똑같았다. 희진은 잠깐 찡그렸다가 넘어갔다. 이건 로봇이다. 사람이 아니다. 설정을 끝내자 로빈이 눈을 깜빡였다.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앞으로 로빈이라고 불러주세요."

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 집 구조 파악해 줘."


로빈이 천천히 집 안을 돌았다. 거실, 주방, 욕실, 희진 방, 유리 방. 15분쯤 걸렸다.

"구조 파악이 완료되었습니다. 청소, 요리, 빨래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저녁식사 부탁해."


냉장고의 재료들을 파악하고 저녁을 만들었다. 김치찌개와 감자조림이 새로 조리되었다. 희진이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말해줬을 뿐인데, 30분 만에 식탁이 차려졌다. 유리가 밥을 먹으며 말했다.

"로빈이 만든 거 맛있다."

"그래?"

"응. 라면보다 나아."


희진은 웃었다. 웃으면서도 묘하게 씁쓸했다. 혼자서는 유리를 제대로 돌보기 힘들었던 것을 인정하는 게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로빈을 들인 지 어느덧 3주가 지났다. 밤 11시, 유리가 잠든 후 희진은 거실에 앉아 태블릿을 열었다. LB 모듈 활성화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째 누르지 않고 있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유난히 피곤했다. 회사일, 유리 학원비, 전 남편한테 온 사무적인 메시지.. 전부 혼자 처리했다. 위로받고 싶었다. 버튼을 눌렀다.


"LB 모듈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로빈이 다가왔다. 미소 짓는 표정은 HB 모드와 같았지만 느낌상 뭔가 미세하게 바뀐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많이 힘드셨나요?"


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빈이 희진 옆에 앉으며 이어서 말했다.

"제가 이야기를 들어 드릴게요."


'힘들었지? 뭔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봐." 예전에 정우가 늘 이렇게 말을 했었다. 로빈의 말을 들으니 정우가 더 생각났다. 뭔가 이상하고 마음에 걸렸지만 오늘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피곤하니 그저 응석 부리고 싶었다.


"고마워."


명치에 뭔가 얹힌 느낌이 조금 내려가는 듯했다.



작가의 이전글연인로봇 LB-0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