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9
오후 4시경, 근무 중에 담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상사의 시선이 등에 꽂혔다.
"유리 어머님, 유리가 요즘 수업 시간에 많이 산만해요. 아프다면서 보건실에 자주 가거나 친구들하고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하고, 점심도 혼자 먹고..."
30분간 통화했다. 네, 알겠습니다, 집에서도 잘 살펴볼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등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다리가 무거웠다.
오후 5시 17분, 학원에서 메시지가 왔다.
'신유리 학생 5시 수업 미등원 안내드립니다.'
처음이 아니었다. 이번 달에 이미 같은 메시지를 두 번이나 받았다. 그때는 넘어갔다. 아이도 지칠 수 있지, 학교 끝나고 바로 학원 가는 게 쉽지 않지, 그렇게 합리화했다.
로빈에게 연락을 했다.
"로빈, 혹시 유리 집에 있니?"
"네, 4시 42분에 귀가했습니다. 현재 식탁에서 간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 알겠어."
연락을 끊었다. 일단 위치는 확인되어서 다행이다만 손이 떨렸다. 담임 전화와 학원 미등원 메시지, 야근 확정이 전부 같은 날 겹쳤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밤 11시 조금 넘어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TV 소리, 아니, 게임 소리가 들린다. 유리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외출복 차림 그대로다. 로빈은 유리 주변의 과자 부스러기를 치우고 있었다.
"유리야."
대답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신유리!!"
"... 네."
"학원엔 왜 또 안 갔어."
그제야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았다.
"피곤해서."
건조하고 귀찮다는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 희진의 관자놀이가 뛰기 시작했다.
"네가 피곤해? 넌 내가 오늘 몇 시간 일했는지 알아?"
"..."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 왔었어. 네 수업 태도가 왜 그러냐고. 맨날 보건실에나 가고 친구들이랑 싸운다며?"
유리가 소파에서 느릿느릿 일어나 앉았다.
"그게 뭐?"
"뭐? 넌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
"맨날 공부만 하라고 하잖아!"
유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희진은 멈칫했다.
"학교 끝나면 학원, 학원 끝나면 집. 집에선 숙제만 하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잖아!"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엄마가 누구 때문에 일하는데?"
"엄마는 맨날 늦잖아! 주말에는 피곤하다고 잠만 자고 나랑 얘기도 안 하잖아!"
"뭐?"
"엄만 나랑 안 놀아주면서 아빠도 못 보게 하잖아!"
유리의 입에서 이혼한 전 남편의 이야기가 나오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찰싹!
유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볼이 서서히 발갛게 달아올랐다. 몇 초간 정적.. 유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희진은 서 있었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비척비척 소파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로빈이 주방에서 다가와 희진 앞에 섰다.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오늘 저녁 11시 12분부터 18분까지, 거실 음성 볼륨이 평균 대비 340% 높게 측정됐습니다."
"..."
"11시 17분에 물리적 접촉이 감지됐습니다. 신유리 님의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했고, 현재 방에서 울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희진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쩌라고?"
로빈이 3초 멈췄다.
"정희진님은 오늘 13시간 근무하셨고, 오후에 신유리님의 담임 선생님과 30분간 통화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학원 미등원 메시지는 이번 달 세 번째였습니다. 많이 지치셨을 거예요."
로빈의 표정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전부 숫자화 된 사실이다. 비난이 아니다. 그런데 희진에겐 비난처럼 들렸다. 전 남편의 목소리가 겹쳤다.
'넌 너무 감정적이야! 유리는 네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고!'
이혼 전 격렬히 싸울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너도 마찬가지잖아!'라고 받아쳤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