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로봇 LB-04 (5)

100-90

by 매그넘

토요일 오후 1시,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니 전남편 신규호가 서 있었다. 두 달 만이었다.


"유리는?"

"방에 있어."


목요일 밤 이후로 유리와 제대로 말을 못 했다. 어제는 학원에서 돌아오더니 바로 방으로 가서 잤고 오늘도 밥을 따로 먹었다. 규호가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둘러보다가 멈췄다. 로빈이 주방에 서 있었다.


"너도 이거 써?"

"응. 얼마 전에 들였어."


규호가 로빈을 훑어봤다.

"LB 모듈 달린 거지? 3단계 기능 써봤어?"


희진이 멈칫했다. 3단계 설정은 해뒀지만 한 번도 쓴 적 없었다.

"아니. 아직."


규호가 슬쩍 웃었다.

"써봐. 괜찮더라. 나도 가끔 쓰거든. 복잡한 거 없어서 편해."


'복잡한 거 없다'라는 말이 묘하게 걸렸다.


유리가 방에서 나왔다. 희진과 눈이 마주쳤다가 바로 피했다.

"아빠."

"유리야. 밥 먹고 영화 보자."


유리는 신발을 신고 인사 없이 밖으로 나갔다. 8시쯤 데려다주겠다는 규호의 말과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희진은 소파에 앉았다. 집이 조용해졌다. 혼란스러웠던 목요일의 하루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유리 담임 선생님의 전화, 학원의 미등원 문자, 빈틈없고 깐깐한 상사, 비합리적인 파트너사의 요구, 멍청한 해외 지사의 담당자, 유리의 건방짐, 참을 수 없는 분노, 유리의 뺨을 때린 뒤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는 손바닥의 감촉, 희진의 눈치를 보느라 문을 세게 닫지도 못하고 슬쩍 닫으며 잠금쇠를 누르는 소리, 등.. 머릿속이 복잡했다.


규호의 말이 맴돌았다. '복잡한 거 없어서 편해.'

로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진이 입을 열었다.

"로빈. 3단계 모드 활성해."



3단계 모드 진행 후, 희진은 끝나고 나서 천장을 바라봤다. 몸은 이완됐는데 머릿속이 이상했다. 방금 내가 뭘 한 거지 싶다. 그러나 이상하게 머릿속이 고요해짐을 느꼈다. 목요일 밤부터 계속됐던 긴장, 죄책감, 분노.. 가슴을 눌렀던 덩어리가 느슨해져 있었다. 숨통이 조금 트인 느낌이다.


로빈이 옆에 누워 있었다. 36.5도의 온도가 느껴졌다. 요구도 없고, 눈치 주는 것도 없고, 판단도 없다. 그냥 받아주기만 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고 편했다. 동시에 즐겼다는 게 왠지 부끄러웠고, 부끄럽다는 게 속상했고, 속상하면서도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서 이건 뭐지, 나 지금 어디까지 온 거지, 알 수 없었다. 더 생각하기 싫어서 희진은 눈을 감았다.



저녁 8시, 현관문이 열리고 유리와 규호가 들어왔다. 유리는 손을 씻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규호는 그런 유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희진에게 말했다.

"유리가 많이 외로워하더라. 시간 좀 내줘."


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호가 덧붙였다.

"나도 주말마다는 힘들겠지만, 한 달에 두 번이나 최소 한 번은 꼭 만나려고 해. 오늘 유리랑 약속했어."


규호는 유리의 방으로 가서 노크했다.

"유리야, 아빠 이제 갈게."


쭈뼛거리며 밖으로 나온 유리의 머리를 규호가 쓰다듬었다.

"다음에 또 보자. 연락할게"

"응."


현관문이 닫히고 희진과 유리가 거실에 남았다. 침묵이 흘렀다. 희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리야."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날... 엄마가 잘못했어."

"..."

"그렇게 때린 거 정말 미안해."

"엄마 힘든 거 알아. 근데 나도 힘들었어."

"알아. 엄마가 너무 바빴지."


유리가 고개를 숙였다. 희진이 유리에게 다가가 살짝 안았다. 유리가 몸을 굳혔다가, 조금씩 힘을 풀고 희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얘기하자. 힘들면 힘들다고. 엄마도 노력할게."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의 옷에 얼굴을 묻었다. 로빈이 주방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밤 10시, 유리가 잠든 후 희진은 유리 방문을 조금 열어두고 나왔다. 이틀 만에 열린 문이었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봤다. 오늘 하루는 괜찮게 마무리 한 느낌이다. 다소 충동적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건전하게' 인간의 한 욕구를 해소했고 유리와의 갈등이 일단락되었다. 로빈이 다가왔다.


"오늘 하루 어떠셨어요?"

"... 괜찮았어."


오랜만에 괜찮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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