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얼그레이 하이볼

by 크게슬기롭다

A가 단톡방에 얼그레이 하이볼이 맛있어 보인다며 링크를 보내왔다. 필요한 건 술과 얼그레이 시럽, 그리고 큰 얼음과 그 얼음이 들어갈 만한 컵이었다. 큰 동그란 얼음틀을 사고 컵을 마련했다. 술과 얼그레이 시럽은 A가 가져왔다. 그리고 함께 술을 마실 B까지, 자그마한 공간에 모였다.

얼려둔 얼음을 꺼내고, 얼그레이 시럽 20ml, 술 30ml, 탄산수 조금을 타서 마셨다. 흠, 무언가 약한 느낌이 들었다. 술도 아니고 얼그레이 홍차도 아닌 맛이었다.


얼그레이 시럽을 더 넣어볼까?

그러자 술의 맛이 좀 약해졌다.

술도 조금만 더 넣어볼까?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A가 무언갈 발견한 듯 이야기했다.

어머 우리 레몬 즙 안 넣었어!


레몬즙을 컵 안에 한 바퀴 돌려 넣었다. 그제야 좀 신기하면서 술맛도 나고, 얼그레이 향도 나는 어떤 하이볼이 만들어졌다. 그다음 잔부터도 문제였다. 계량을 하는 게 좀 귀찮았다. 술도 마셨겠다 눈대중으로 넣기 시작했다. 얼그레이 시럽은 수저로 4번, 술은 콸콸콸, 탄산수는 찔끔, 그리고 레몬즙만 똑같이 한 바퀴 넣었다. 한 입 마셔보곤 혀로 조금 느꼈다가 원하는 맛을 찾아 조금 더 넣었다. 아무 술 대잔치가 시작되었다.

술을 더 좋아하는 나는 위스키를 잔뜩 넣었다가 우려 섞인 한마디를 넣었다. 단 맛을 좋아하는 B는 술맛보다 얼그레이 향이 더 많이 나는 정도의 비율이 좋다고 했다. A는 내가 타둔 술도 한잔 마셨지만, 그가 준비해온 레시피대로 최대한 넣어마셨다.


술과 함께한 안주가 약간 아쉬웠다. 달고 맛있는 빵들을 잔뜩 준비했는데 그게 얼그레이 시럽 맛을 잘 느끼게 해주지 못할 거라고는, 막상 먹기 시작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담백한 음식 혹은 구워 먹은 것들이 준비되어있던 위스키 바의 메뉴들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렇다고 새로운 메뉴를 찾을 정신은 없었다. 이미 많이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부터 밤까지 재료는 같으나 각자 다른 술을 마셨다. 자기가 만든 술만큼 빠르게 곯아떨어졌고, 술을 많이 넣겠다는 내가 가장 먼저 끝이 났다. 그다음이 B였다. A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심지어 집에 갈 수 있겠다며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레시피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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