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와 레몬, 그리고...

by 크게슬기롭다

집에서 많은 것들을 혼자 하고 살고 싶었지만, 에스프레소는 남이 내려준 걸 먹는 게 참 맛있다. 갈린 좋은 원두를 열과 압력으로 압축하고 물을 통과시켜 그 액기스를 받아먹는 과정은, 내가 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을 때 더 좋은 맛이 나곤 했다.


주변 에스프레소 바를 하나 발견했다. 이쁘게 생긴 건물, 그 속에 신경 쓴 느낌이 가득한 메뉴판과 벽의 장식, 의자와 사람들의 배치까지 마음에 들었다. 안과 바깥 둘 다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바깥에 앉았다. 주황색 불빛이 은은하게 켜져 있는 곳이었다. 바깥에 놓인 나무의자 아래에 바퀴가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헉하고 놀랐다. 이런 의자를 선택할 정도라면 청소도 신경 많이 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받아 들었다. 이곳은 테이블 사용 시 첫 에스프레소는 아메리카노 수준의 가격을 받고, 두 번째부터 2천 원 대의 에스프레소 값을 받았다. 우선 한 잔을 시켰다. 4천 원대의 에스프레소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에스프레소에 레몬을 껴 넣은 음료였다. 내가 아는 두 가지 재료가 생각지 못하게 섞여있을 때 오는 기대감이 있지 않나. ‘나만 이 조합을 몰랐나? 이게 이렇게 맛있다고?’ 하는 생각에 기대감 한 모금 마셨다. 흠, 기대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아는 커피맛과 내가 아는 레몬의 맛이 섞여있을 뿐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레몬을 혹시 다 짜면 맛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때부터 수저로 열심히 짓이겼다. 한 조각받은 모든 레몬을 다 짜고 나서 한 입 더 마셨다.


헉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이렇게 금방 투덜거리는 사람이었나, 신중하지 못했나? 여기부터 레몬과 커피의 조합을 다시 보게 된 이야기까지 한 번에 주르륵 생각을 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못 믿겠다는 듯 다시 한번 마셨다. 와, 여전히 좋았다. 레몬과 커피가 적정한 비율이면 이런 맛이 나는 거구나 하고 놀랄 정도였다. 신맛은 오히려 줄어들고 커피와 조화로운 어떤 맛을 내었다. 허허, 놀랍구먼 하고 또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바닥이 보였다.


바닥엔 설탕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 혀가 놀랐던 것은 레몬과 커피의 새로운 조합이 아니었다. 레몬과 커피, 그리고 설탕의 삼박자에 감탄을 했던 것이었다. 맛이 좋아졌을 때 스스로 떠올렸던 그 많은 생각들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설탕의 힘을 다시 알아챘다. 달기만 한 재료가 아니라, 어긋나게 느껴지는 두 재료 (에스프레소와 레몬) 만나게 해주는 존재였다. 작고 칼로리만 높이곤 하던 설탕을 다시 봤다. 누군가가 내게 설탕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면, 수많은 설탕 이야기 중에 이런 에피소드를 꺼내도 좋겠다.


레몬이 담긴 커피는 별로였지만, 그 아래 설탕과 함께 마시니 참 맛있었어요, 현재 레몬과 커피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면, 커피 바닥에 녹아있을 ‘자신만의’ 설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탕 맛뿐 아니라 지금의 쓴 두 가지 맛과 콜라보레이션이 된 제3의 결과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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