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은 사람의 9월 밤

0.05 / 1052

by 크게슬기롭다

9월은, 도망치기 좋은 날이다. 뜨거운 여름을 얼마나 열심히 견뎌냈는가! 견디고 버텨낸 끝엔 자기만의 ‘결심’ 이 생긴다. 그리고 그걸 지켜내기 위해 움직인다. 누구는 멈추고 누구는 움직인다. 그 행동엔 각자의 이유가 있다. 자기만의 맥락이 생기는 것이다.


주변의 한 사람이 생존을 하고 버텨내기 위한 자기만의 노하우를 이야기해 주었다. 철저하게 대상을 분석했다고 했다. 그 분석 끝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벌려야 자기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렇게 파악하고 나서야 말을 줄이고 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드디어 자기를 포함한 주변 상황에 대한 분석과 트라이얼 테스트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나선 이별을 고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낮춰 ‘도망가는 것처럼' 말을 했지만 나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그가 매트릭스를 인생영화로 꼽았을 때부터 그의 깊은 속내를 느꼈는데, 그게 이번에도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심사숙고 후 결정.


그렇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되돌아보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도망의 기회를 놓쳐’ 왔는가. 나에게도 상황은 끊임없이 도망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매번, 여름휴가를 가지 않고 사람이 가장 적은 11월 휴가를 가야 한다며 그 말을 삼켰다. 떠나고 싶었던 9월엔 11월의 휴가를 보며 나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던 것이었다. 그렇게 들썩이는 마음을 잠재우고 휴가를 가서 털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마음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일상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가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 만족감이 ‘멍청한 현실 인식능력’을 돼 덮어버릴 때까지 나는 합리화를 해댔다. 나는 나만의 목표가 있고, 꿈이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꿈은 꽤나 달콤했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도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 꿀을 빨지 않기로 결심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 나를 움직일 때마다 그 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아마 데미안 소설에서 묘사된 그 ‘알'이 이게 아니었을까. 데미안은 청소년기에 깨달은 그 알의 실체를, 나는 그보다 곱절의 나이를 더 먹고 나서야 마주했다. 그 청소년기의 힘은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 더 이상 답이 없다는 걸, 미련이 없을 때까지 인식하고 나서야 알았다. 지금이 도망치기 딱 좋은, 9월이라는 것을 말이다. 날씨가 선선하다. ‘도망’ 이라고만 검색해서 나오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몇 개 봤을 뿐인데 수많은 ‘도망지지자’들이 나타나 내게 도망을 권한다. 책도 추천받았다. 도망갈 때 가장 무서운 얼굴이 된다는 의미의 책을 보니, 내가 도망가는 표정도 문득 궁금해졌다.


꺼진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내 눈을 마주했다. 이 표정이었구나. 모든 외부에 대한 불신과 경계로 가득한 표정. 하지만 그 눈엔 힘이 있다. 그래서 무섭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로부터 가장 먼 방향으로 가고 싶은 그 마음이 가득한 표정을, 이젠 기억해야겠다. 나의 내년 9월은 이 표정으로 살지 않길 바라니까.


_89e46a8b-955d-4e10-bca5-b0cbd0a181d3.jpeg 빙 / DALLE / 프롬프터 : 9월의 가을에 퇴사를 하고 싶어하는 직장인 옷을 입은 사람과 바쁜 도시, 인상주의


매거진의 이전글아침 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