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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야 했다. 주어진 시간은 30분 정도였다.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뭔가 글 하나를 주욱 써 내려가도 부족한 시간에 아예 생각이 나지 않다니, 이러다 커서 깜박이는 것만 보다 끝날 셈이었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30분 동안 짧은 이야기라도 써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이 답답했다. 글을 쓰고 싶었던 때가 한창 있었는데, 되돌아보면 그건 사람들이랑 많이 만나지 못해 일어났던 현상 수준이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로 풀어내니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 결과 머릿속에 남은 실마리 같은 이야기도 하나도 남지 않았던 것이었다.
위기감을 안고, 최근에 쓴 글들의 주제를 돌아보았다. 퇴사하는 동료를 바라보며 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몇 번을 그렇게 퇴사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니 더 이상 그 주제로 할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늘 보고 들은, 사람들과 주고받은 어떤 '교류'에 대해 쓰자니 한 문단을 겨우 짜내는 게 전부일 것 같았다. 글을 쓸 만한 에피소드가 남아있지 않았기에 이야기들을 죄다 기워내야 했다. 뭐 좋은 목걸이라고 그렇게 기워야 하나 싶어 조금 더 내 삶에 가까이 들어갔다.
먹은 이야기를 쓸까 싶어 최근에 먹고 다녔던 것들을 썼다. 그렇게 몇 개 쓰다 보니 머릿속에서 새로운 물길이 뚫린 것처럼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좋아, 이거였어. 이건 할 말이 꽤 많은 주제였기 때문이다. 최근에 여러 신변의 변화 때문에 주 활동지가 바뀌게 되었다. 기존 활동지에서 하던 여러 습관들이 의도치 않게 없어지고 무너지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식습관이었다. 더 이상 이 주변 맛집에 방문해 음식들을 먹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마치 다이어트 전 마지막 만찬을 즐기듯, 약 2주가량 주변 맛집들을 찾아 헤매곤 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모조리 외식으로 바꾸었다. 아침과 저녁은 30cm짜리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사서 먹었다. 점심은 그날의 주변인들과 이야기를 하며 한 두 번 먹었다. 가끔은 혼자 가서도 먹었다. 만두집과 김밥집이 그랬다. 라멘집은 한 두 명과 함께 갔다. 가장 많은 인원과 함께 먹었던 건 스테이크였다. 세트 메뉴를 잔뜩 시켰고, 샐러드와 치킨 텐더가 담긴 메뉴까지 추가했더니 음식이 남는 수준까지 왔었다. 평소 도시락을 싸 다녀서 그런가 생소했다. 약간 모자라게 먹곤 했던 나는 '숟가락은 그릇 아래까지 박박' 긁곤 했기 때문이다. 그 맛을 어찌 한 번이라도 더 느끼겠다고 입맛을 다시길 반복했었다. 음식을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기지 않고 그 끝에 서려있는 맛까지 모두 느꼈던 '기존' 의 상태가 '과거'가 되는 순간이었다. 더이상 연속성이 없었다. 그럴 일은, 외식을 하면서 발생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음식들은 많았고 남겼다. 아쉬움도 모자람도 없이, 마치 신탁의 이야기를 잘 들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상상 속) 오디세우스와 같았다.
그 차이에 집중했다. 그리고 나서 격차가 발생한 이유를 적어내려갔다. 잔뜩 음식을 먹은 이야기와 외식하게 된 이유 말이다. 그러자, 머릿속에선 다시금 나의 현재 상황과 이어 붙일만한 말들이 떠올랐다. 평소에 갖고 있던 몇몇 습관들을 고치고 싶었던 내 모습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썩 고쳐야 할 정도로 삶 속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기에 행동을 크게 달리 하지 않았었다. 고치겠단 다짐만 세상에 내뱉고 원래대로 돌아갔다. 좀 짜증이 났지만 '이것 또한 내 모습이다' 하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니 행동이 바뀌기 시작했다. 음식에 대한 내 태도가 달라졌다. 그 태도를 며칠 반복하다보니, 스스로 갖고 있던 음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깨달을 뿐 아니라, 그 상태 자체가 사라졌다. 배고프면 먹는 건데, 배부르면 내려놓는 거지 하고 가볍게, 툭,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결과 30분을 쭉 써 내려갈 수 있었다. 먹은 음식이 내게 준 결과에 대한 글이었다. 다른 상황에도 또 적용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