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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보니 오전에 시켰던 반숙란 60개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종이 박스 안에서 계란을 통에 나눠 담고 냉장고에 넣으려다 보니 자리가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1주 전, 아버지의 레시피를 따라먹겠다고 산 야채통이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엔 많이 먹겠다는 야심과 욕심을 담아 길게 디스플레이된 걸 샀는데, 그게 꽤 골칫덩이 었다. 우선 야채를 빼두고 60개 계란통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하루 한 끼 3개씩, 매일 먹는다면 20번 만에 끝날 양이지만 아마 하루에 2번 정도 먹을 것 같다. 약 10일의 단백질을 준비 완료. 이젠 야채를 처리해야 할 상황이었다.
쌈 채소,라는 이름으로 여러 이파리들이 (감사하게도) 시들지 않고 잘 버텨내(!) 주고 있었다. 상추뿐만이 아니었다. 억센 느낌의 어떤 것, 쓴 어떤 것, 봄동처럼 생겼지만 봄동이 아닌 것들이었다. 한창 상추와 깻잎에 빠져있을 땐 그렇게 부들거리고 금방 찢기는 이파리 채소들만 먹었다. 오랜만에 억센 초록색들을 마주하니 낯설었다. 그래도 그 강함 덕분에 시들지 않았겠거니 싶었다. 물에 잔뜩 헹군 다음, 체에 얹어두어 물을 뺐다. 가장 위에 올려둔 잎을 하나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하나를 먹고 맛있으면 자꾸만 먹을 것 같은 걱정도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다시 무시했다. 우선 눈앞에 놓인 이걸 하나 잡고 맛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억센 것들 중 가장 작은 걸 하나 골라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오! 기대보다 너무나 맛있었다. 최근까지 먹었던 야채들은 냉동 슬라이스였고, 전자레인지에 3분 정도 돌려 나온, ‘스팀 베지터블’ 들이었다. 익힌 야채들, 육각형 이상의 면을 가진 것들이었다. 그런 것만 한참 먹다가 2차원 종이 같은 야채를 오랜만에 먹으니 그 식감도 괜히 신경 쓰였다. 왜 이 런 방식의 감각을 잊고 살았을까. 물기가 가득한 토마토, 얇은 아스파라거스, 초록의 브로콜리와 하얀색 콜리플라워 같은 것만 먹고 있었다. 그 외의 이파리는 잘게 잘라진 깻잎 고명정도로만 만났었다. 고기를 시켜 먹어야 상추쌈을 먹는데, 그렇게 외식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충 변명거리를 찾아본다.
야채는 뭐랑 먹어야 맛이 있나. 어릴 적엔 쌈장을 찍어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어느 날부턴 익힌 배추와 차돌박이 찜에 빠져 한참 그렇게 먹었다. 고기 한 장과 배추 한 장, 그리고 간장 소스에 살짝 찍어먹는 수준이었다. 그 외의 다른 요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상추 삼겹살 김밥을 먹을 때가 아마 마지막이었을 것 같다.
쌈용 채소에 뭘 바라나, 그냥 쌈만 잘 싸 먹으면 되지 싶다가도, 왜 쌈 용 야채를 쌈 싸는데에만 먹었나 그 멋진 기회들을 왜 죄다 놓치고 살았나 싶다. 차돌박이와 배추가 잘 어울리듯이, 각자의 이파리는 가장 잘 맞는 단백질들이 있지 않을까. 샌드위치를 먹을 때 에그 스프레드와 양상추가 함께 있을 때 더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쌈용 채소도 삼겹살 말고 더 많은 것들을 만나 나름의 조합을 만들어볼 기회가 필요하다. 그 이파리에게 필요한지, 내게 필요한지 지금은 헷갈리지만. 아무튼 쌈 채소의 맛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맛있다고 느낀 나머지 쓴, 맛있는 이파리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마친다.
추를 활용한 엄청 많은 요리가 놓인 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