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이 주는 힘에 관하여.
영화와 글쓰기
올해 초 브런치를 처음 시작하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글을 쓰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영화 그리고 다녀왔던 수많은 세계 곳곳의 도시들에 대한 글을 써보려 했는데, 겪어본 적 없는 너무나도 많은 할 일들에 글을 쓰는 것이 소홀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과정'에 해당되는 시험과 같이 나를 증명하는 일들을 하고 있지만, 정작 이 동안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는 게 모순 가득한 현실이다. 이렇게 하여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 조차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끔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썼던 글이 2달 전이어서 이번에는 작년 이맘때 브런치가 아닌 '오마이뉴스'에 시민 기자 자격으로 업로드했던 기사글을 이곳에 옮겨둬야겠다.
완벽하지 않지만 '따뜻한' 이 가족의 특별한 여름 나기
극 중 남매인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는 아버지(양흥주)를 따라 할아버지(김상동)가 홀로 살고 있는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다. 남매의 아버지는 본인의 아버지에게 여름 동안만 신세를 지겠다 하지만, 사실은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다. 그러던 중 남매의 고모(박현영)까지 이 집에 오게 되며, 결국 가족 5명은 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여름을 보내게 된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2019)>은 윤단비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밝은 미래상을 비롯해 다수의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특별하지 않은 가족 이야기
<남매의 여름밤>은 첫째 옥주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남동생 동주와 자주 티격태격하곤 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동생을 위하고 있는 누나이다. 동시에 아버지의 맏이이기도 한 옥주는 아직 철이 들지 않은 동생과 다르게 점잖은 보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딸이다. 오랜만에 만난 고모 와도 스스럼없이 지내곤 한다. 그러나 옥주 또한 때로는 동생과 싸우기도 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는 어린 학생일 뿐이다.
옥주의 가족이 무슨 일을 계기로 할아버지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상황이 안정되어 있지는 않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에 할아버지는 갑자기 나타난 아들 가족에 이유를 묻지 않으며 단지 방 몇 칸 내어주며 맞이할 뿐이다. 옥주의 고모 또한 남편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함만 예상할 수 있을 뿐 자세한 상황은 묘사되지 않는다. 이에 역시 할아버지는 그저 맞이할 뿐이다.
<남매의 여름밤> 속 이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온전한 가족의 형태는 보여주지 못한다. 누구는 어머니가 없고 누구는 남편의 존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 누구보다도 서로를 생각해주고 걱정해주는 존재가 함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아니겠는가. 윤단비 감독은 이 다섯 명이 함께 지내게 된 이유나 설명보다는 가족의 따뜻한 모습과 그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드라마 장르의 힘을 보여주다
'눈앞에서 유년기의 어느 계절이 절실하게 흘러간다.'
- 이동진 영화 평론가
<남매의 여름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기 있는 영화'의 의미에서 조금은 정적이고 지루할 수 있다. 많은 대사와 화려한 볼거리가 가득한 기존의 다른 영화들과는 그 차별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서로의 진심. 온 가족이 함께 모인 할아버지의 생일 파티와 같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들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가족애. 이러한 연출 요소들이 <남매의 여름밤>을 더욱 매력 있는 영화로 만들었다.
관람하는 사람들이 웃고 놀랄 수 있는 것들도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성이지만, 보며 공감하고 때로는 등장인물에 감정이나 본인의 경험을 이입하기도 하는 것 또한 영화가 가진 힘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남매의 여름밤>은 성공적으로 그 힘을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영화계에 잔잔함과 따뜻함을 제시하다
그동안의 한국 영화는 많은 비판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대다수의 영화들이 신파극, 이른바 '억지 눈물 짜내기'에 치중되어 왔기 때문이다. 누구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장치를 위주로 영화를 제작해, 감동적인 영화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과 은은한 감동은 다르다. 순간의 뜨거운 자극보다 은은한 따뜻함이 더 오래가기 때문이다. 윤단비 감독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치가 아닌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감동 요소를 포함시켜 더욱 따뜻한 영화를 만들었다. 등장인물 어느 누구도 격양된 감정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의 눈물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 영화계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의 영화 <어느 가족 (2018)> 또한, 이 영화와 같이 평범하지 않는 가족을 보여주며 그들의 우여곡절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억지스러운 감동 장치를 내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깊은 여운을 남겼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이외에도 벨기에의 장 피에르 다르덴 그리고 뤽 다르덴 감독 등 해외에는 잔잔함을 노래하는 감독 및 작품들이 꽤 많다.
그러나 그 규모가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이러한 작품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990년대 후반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영화계를 풍미했던 허진호 감독의 연출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그리고 <봄날은 간다 (2001)>는 충분한 은은함을 선보였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국 영화에서 더 이상 쉽게 찾아보기 힘든 소재와 연출 기법이 되었다. 자칫 관객들이 따분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어떠한 것은 분명히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남매의 여름밤>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써본 기사와 2020년의 영화들
작년에 수강했던 강의의 교수님께서 누구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작성해보라고 하셨다. 지금은 예전만큼 강렬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기자를 꿈꾸곤 하는 나에게 이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평소 쓰던 문체를 벗어나 소개하는 글을 쓰고 정보를 전달하는 글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글이 주는 힘은 여전히 느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 2020년 11월 27일. 1년 전 쓴 글이지만 이 글이 정식 기사로 채택되었을 때 느꼈던 소소한 기쁨은 여전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왓챠피디아에 나름의 별점을 남기고,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간단한 한 줄 평을 쓰곤 한다. 더 깊고 긴 얘기를 하고 싶을 땐 날을 잡고 브런치에 글을 쓰며, 메모장에는 그 영화를 본 날짜를 써둔다. 2020년은 1월 13일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귀국해, 2020년 처음 봤던 영화인 제임스 맨골드의 <포드 V 페라리 (2019)>로 시작해 12월 31일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 (1990)>로 끝냈다.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본 해였지만, 특히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은 지금까지 그 여운이 기억난다. 혹자는 얼마 전 개봉했던 드니 빌뇌브의 <듄 (2021)>과 같이 촬영의 기법이 거대하고 스케일이 큰 영화를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하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로 잔잔하고 조용한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 느끼는 압도됨이 더 클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의 조용하고 컴컴한 공간 속에서 느끼는 나만의 온전한 감정과 기분은 그 영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2020년 9월 8일 CGV 여의도에서 봤던 <남매의 여름밤>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