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리

사람 손이 필요해

by 마구리

밭일 개시 이후 며칠이 흘렀다. 비 오시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들은 말로는, 일명 '노가다'는 비오시는 날이 쉬는 날이라고 한다. 날씨 그중에서도 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조건이 흑/백으로 갈린다. 밭에 물이 괴면 뭐든 하기가 난망하기 때문이다.


첫날 워낙 빡세게 신고식을 치른 터라 며칠 쉰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오늘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일과 끝~ 오후 다섯 시에 마치고 나니 몸이 한결 가볍다. 집에 오자마아 종일 걸치고 있던 옷들 세탁기에 돌리고 땀범벅 몸부터 씻었다. 은근히 밭일 체질인가 싶기도 하고, 첫날 경험했던 욱신욱신은 아예 없다.


밭일에 대한 체험을 정리해 올려야지 하며 선택한 지면이 브런치다. 지인 중 몇몇이 브런치에 글 올리는 걸 본 적 있었고, 그 중 몇몇은 제법 읽을만했었다. 브런치에 흘깃 눈 돌리다가도 그 전엔 페북에 몰두하느라 시간도 마음도 여우가 없었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페북도 블로그도 다 접고 나니 이제서야 브런치에 다가설 여유가 생긴다.


막상 글을 올리려고 보니 브런치에서 활동할 이름과 주소를 정해야 한다. 뭘 해야 하나. 이것저것 넣어보아도 다 선점된 이름과 주소가 많다. 요것저것 넣어보다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아 향 공양 겸 바깥 바람 세고 왔다. 그때 문득 떠오른 단어가 '마구리'다. 입에 착 달라붙고 좋다. 내친김에 필명도 주소도 마구리 magurl로 통일. 속 시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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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일에서 마구리는 비닐 멀칭의 끝자락을 사람 손으로 다듬어 묶어 놓는 걸 뜻한다. 풀과의 전쟁에서 비닐 멍칭은 획기적인 전환점이다. 사천 평, 만 평 되는 땅에 하나의 작물 - 삼월 중순인 요즈음은 감자 찍기 철이다 -을 키워내려면 감자 외에 다른 풀들의 생장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감자가 잘 들기 때문이다. 비닐 멀칭도 기계의 손을 빌린다.


기계로 멀칭을 한다손치더라도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비닐 한쪽이 뜨게 되어 있다. 아마도 마구리까지 완벽하게 되는 기계가 출시된다면 전국의 농민들은 환호할 거다. 아직까지 그렇지는 않다. 그러니, 마구리 정리는 사람 손을 빌릴 수밖에는 없다. 오늘 감자 찍는 내내 종일 마구리 정리를 했다. 그 기억이 몸에서 살아나면서 마구리라는 단어가 떠오른 모양이다.


내일은 저녁 늦게나 비 소식이다. 그래서 내일도 새벽부터 다시 감자찍기에 나설 예정이다. 괭이 들고 흙 뒤집을 때, 오늘 이 순간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얼마나 마구리를 하게 될까. 모르겠다. 그런 거 따질 겨를 없다. 새벽에 일어나 나서러면 얼른 자야 한다. 마구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 날을 축하한다며 맥주나 한 잔 하고 자라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린다. 암튼 축하한다. 마구리.


2022-03-16, 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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