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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ergreen Sep 26. 2023

1995년 설날

경상도 어느 집의 설날



할매가 앞에서 걸어가신다.

낡은 유모차를 꾸부정한 허리로 끌고 가시는 게 아니라 두 발로 온전히 걸어 가신다. 

언니와 나는 그 뒤를 따라 쫑알쫑알 수다를 떨며

바퀴달린 장바구니를 덜덜 끌고 산을 하나 오르고 가파른 내리막을 조심히 내려간다. 

소방서 앞 큰 도로를 건너면 제법 큰 5일장이 펼쳐져 있다. 


전을 구울 재료들을 산다.

동태, 동그랑땡에 넣을 돼지고기 간 것, 당근, 부추, 

육전 꺼리, 탕국에 넣을 무우, 홍합 말린 것, 

아무도 먹지도 않던데 매 번 사는 무당집 같은 색깔의 과자, 

금새 장바구니가 가득 찬다.

"할매, 나 배고파여~!" 뒤에서 조르면 

할매는 골목 어귀의 칼국수집에 들어가 국수 하나씩 사주셨다.


"야가 jj라? 야가 ee고? 야들이 또 이키 컸어? "

국숫집 사장님은 반갑게 아는체 해주신다.

그 아는 체가 기분이 좋다.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게 또 신이나 

칼국수에 밥까지 말아 먹으며 밥을 잘먹는 척을 하고 배가 든든해져 나온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는 생밤을 물에 담가 놓으신다.

그러면 해 뜨는 아침에는 술에 취하지 않고 정신이 온전하신 할아버지가 앉아서 빨간색 과도칼을 들고와 갈색 밤 껍데기를 치신다.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이때는 우리 할아버지가 제정신일 테니까. 


"오늘은 술좀 덜 잡사요. 내일 아들도 오는디."

"거, 씻팔. 또 지끼쌓네."

가만 생각해보면 나의 찰진 욕지꺼리들은 모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한테서 구수하게 배운것도 같다. 


어김없이 명절 전날에도 소주를 거나하게 드시고 할아버지는 저 멀리 골목에서부터 노래를 부르신다.

"내가~ 술을~ 좋아서 먹나~ 내가~ 술을~ 좋아서 먹나~" 

좋아서 드시는 것 같은데 맨날 부르는 노래는 저렇다.

안 좋아서 드시면 왜 드시나, 대체.


또 할아버지는 눈알이 하얗에 변해있다. 

"ee 야이, "

"네, 할부지."

"천금 ~ 같은~ 우리~ ee~"

이번엔 천금같은 옥금같은 우리 ee노래를 연달아 부르시다가 이내 잠이 드신다.


"으이구, 씻팔, 부애나 죽겠네. 허구헌날 술을 쳐먹고."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괴물같이 변했을 때는 주방에서 못 나오시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주무시면 속에 담긴 이야기를 쏟아 내신다. 

그러면 그 조용한 저녁에 

며느리 둘 일손을 덜어줄까 싶어 

할머니와 언니와 나는 명절 음식 준비를 시작한다.


이쑤시개에 꼬지를 끼우고, 동그랑땡을 요리조리 만들어 모양을 내고

과일을 닦아 놓고 

별달리 재미 있을 게 없는 시골집에서 

다음날 사람들이 모인다니 신이 나 일찍 잠이 든다.



찬물만 마셔도 해장이 잘 되는지 할아버지는 해만 뜨면 제정신이셨다. 

"크흠" 헛기침 한번 하고 일어나 쇠죽을 주시고는 조용히 들어와 뉴스를 보신다.

오늘은 식구들이 몇시나 올까 아침을 서둘러 먹고 기다리지만 


결혼한지 몇 해 되지 않는 새엄마는 버스를 타고 와야 해 점심 먹고즈음 도착한다 하고 

작은 엄마는 아침먹고 이제 출발한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신다. 


성격급한 할매는 뭐하러 기다리냐고, 전 부치고 있자 하셔서 

할매, 언니, 내가 셋이 주방에 앉아 이야기를 하며 전을 부친다. 


한 소쿠리 전이 채워 질때쯤 할매는 어김없이 

"야이, 할부지 오시라 캐. 전하고 소주 한잔 드시라 캐."


그놈의 소주 소주, 아이구, 지겨워.

그래도 할아버지 기분을 맞춰 드리려고 달려가 부른다.

"할부지, 할부지 전이랑 소주 먹어!!!"

쇠죽을 주고 나 지푸라기가 회색 잠바에 붙어 있는 할부지가 손으로 털고 들어와 

소주 대병을 따 틀니가 어설프게 달려있는 채로

전을 질겅질겅 씹어 드신다. 



곧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작은 엄마가 도착했고

사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미안할 것도 없는 엄만데 

그렇게 미안해 하며, 죄스러워 하며 급히 자리에 앉았고 

그제서야 네명의 손녀들은 거실에 앉아 장난을 치며 놀았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니 

언제 임신했는지 배가 불러 온 새엄마와 아빠가 도착했다. 

낯설다, 그래도 엄마라니까 좋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식구들이 북적대는 이 집이 좋아 한참을 더 까불대다 

할머니, 할아버지, 언니와 나는 소 마굿간 옆의 아르방에 누워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어머님! 어머님 일어나 보세요!"

"아이고, 왜!"

다급하게 깨워 집으로 가보니 새엄마 양수가 터졌단다. 

지난 번 임신했을때 아들이 유산되었었더라는 이야기를 뒤늦게 하며 

이제 아이를 낳으러 가야 겠다며 

분주히 차를 타고 새엄마, 아빠, 운전할 수 있는 작은엄마가 병원으로 갔다.


나는 그저 건강히 아이만 태어나 주길 바랬는데 

그밤을 지나고 나니 

명절 분위기가 어두워 져 있었다. 


또 딸이란다. 


그게 어때서, 하지만 이집에 아들이 얼마나 귀한지 알고 있기에 

나도 그 무거운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동참해 말을 아꼈다. 



할아버지는 설날 연휴 내내 또다시 소주 대병을 드시며 

"내가~ 술을~ 좋아서~ 먹나" 하며 드셨고 


할매는 그런 할아버지 눈치를 살피느라 더욱 수척해 지셨고 


아빠는 엄마 짐을 가지러 집에 갔는데 

주택의 느슨한 방범을 뚫고 들어온 도둑놈이 눈치도 없이 

하필 아들 귀한 집에서 딸 막 낳은 좌절한 아비의 집에서 태평하게 자다 

아빠의 분노를 한몸에 받아 

무한 구두 발길질을 받고는 경찰에 끌려 갔다는 이야기와 


나는 내 사랑이 뺏길 동생이 아니라 

워낙 받은 사랑도 없어 

그저 내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생이, 여동생이 태어나 

그들 틈에서 혼자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 동생이 어느새 자라 

나와 같은 마음의 병을 앓고 

수척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마 네가 태어난 그 날, 

한바탕 소동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들 더 뜨겁게 너를 축복해 주고 안아줬더라면 

네가 지금은 조금 더 풍성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2023년 9월 

추석이다.

그 동생이 이번에는 명절을 맞아 우리 집에 온다고 한다. 

너에게 이 언니는 

그 날 설에 네가 못 받았던 축하와 사랑과 응원을 가득 담아 

너에게 줄 생각이다.

너를 데리고 이 동네 저동네 다니며 맛있는 밥을 먹이도 

너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네 삶을 응원한다고 손을 꼬옥 잡아줄 거다.


너는 부디 내가 살았던 이 우울한 삶을 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너에게 만큼은 내가 삶의 온기를, 열정을 가득 담아 줄 거다.


어서 온나, 

내 동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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