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도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언니, 통화 할 수 있어?"
늘상 메신저로 연락을 하던 바로 밑 동생이 이렇게 전화를 걸어오는 날이면
'아이가 버거운가보다,'싶어 하던일을 멈추고 전화를 받는다.
"언니, 엄마가 말도 어눌해지고 어지럽대...."
"응? ...(사실 새엄마이기도 하고 별 걱정이 되질 않아서 3초간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늦둥이로 낳아 놨으면 건강좀 돌보고 오래 내 곁에 있을 생각을 해야지. 대체 왜 저렇게 방치하고 있는 지 모르겠어. 아빠도 병원에 좀 데려가주지..."
동생이 운다.
다큐가 아니라 짜고치는 연기의 드라마에서도 누군가 울면 곧장 따라 우는 나 이지만
엄마에 대한 이야기에는 동생이 울어도 공감이 되질 않는다.
"음.... Y야. 음........."
되도안한 조언을 이어갔다. 심리책에서 읽었던 어줍잖은 이야기를 해 준다. 이제 너도 어른이니 감정의 분리를 하라는 둥, 여지껏 아빠의 회피성 행동들을 비난하기도 하고, 무심한 엄마의 잘못도 은근히 들추어 내며 통화를 겨우 마무리 하고 찝찝하게 끊었는데 갑자기 한 장면이 스쳐간다.
낡은 속옷을 씻고 나와 주섬주섬 입는다. 잠옷도 구멍이 다 터진 것을 입고 나와 달달거리는 선풍기 앞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말리시는 엄마.
결혼 때를 놓쳐 노처녀로 살고 있다가 재혼자리라고 들어온 자리는 이혼한 남자와 함께 딸린 딸 둘.
지독하게 사랑이란 걸 하셨을까, 아니면 각자의 위치에 맞는 자리라 생각에 현실과 타협한 걸까
둘은 결혼을 했고 신혼의 단꿈도 없이 사춘기 두 딸을 마주한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가난한 어느 경상도 집안에 시집을 와 노산에도 딸 둘을 더 낳았고
아빠의 월급으로 딸 넷을 기르면서 그녀는 사실 본인이 입을 옷 하나 제대로 산 적이 없다.
차라리 내게 표독스럽게 나쁜 말을 쏟아붓던 그 장면이나 떠오를 것이지
캠핑을 나와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던 내게
대비되는 모습으로 살아가던 새엄마의 모습이 그토록 생생하게 떠오를 건 뭐람.
햄버거 하나 본인의 두 딸에게 세트로 사다 주지 못해 단품으로 사다 먹이던 그녀를 곱씹으며
나는 직감했다.
이제 진짜 용서해야 할 때가 왔구나.
동생에게 다시 메신저를 보냈다.
"엄마 생신이 다음주던데, 그 다음 토요일에 내려올 수 있어? 우리 다 같이 만나자."
되도안한 위로를 준 것도 미안하고 어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날을 잡았다.
서울에서 동생은 하루 전날 내려와 엄마의 건강을 살폈고 다행히 뇌 쪽이 아니라 노화로 인한 이석증이라며 약을 드시고 호전되어 있는 엄마를 보고 동생은 많이 마음이 놓인것 같아 보였다.
시댁 부모님 생신은 늘 1박 2일로 모시고 여행을 갔었는데
친정 부모님 생신은 늘 식사 한끼만 식당에서 하고 잠시 집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서기 바빴는데
이번 생신은 왠지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수줍게 꽃다발을 준비했고 동네에 잘 드시는 식당을 예약했다.
테이블 두 개를 예약해 하나에 엄마, 나, 딸아이가 앉았다.
나는 불행자랑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불우한 환경에서 이만큼 잘 자란 사람임을 자랑하기 좋아해서 철없이 딸아이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놓았었다. 새엄마와 함께 살며 받았던 구박들, 그럼에도 나는 이만큼 잘 자랐다는 것을 수없이 이야기 했었는데 사춘기 딸아이는 앞에 앉은 새엄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건넨다.
"야이, 키가 얼마라?"
"저요? 겨드랑이 털 나면 키 다 컸다는데 저는 이제 끝난 것 같아요."
굳이 안 해도 될 이야기 같은데 그 이야기를 하며 까르르 웃어주니 분위기가 한결 편해진다.
"미역국 줄까?"
"네. 할머니. 여기요 그릇."
"야이, 고기 더 먹어. 여 있어."
"네, 할머니도 더 드세요."
밤톨만한 사춘기 딸아이, 내 속을 여전히 애타게 하면서 내가 미워했던 새엄마를 품는 아이를 보며 한없이 부끄러워 밥이 들어가질 않는다.
식사값을 계산하고 근처의 산책로를 함께 걷는다. 두 아이가 재잘거리며 따내는 더 편한 외할아버지 주변을 멤돌며 걷고 언제나 우직한 남편은 말없는 장인어른 곁을 함께 걷는다.
그 뒤로 내가 그 모습을 보며 걷고 그 뒤에는 한없이 나이 든, 연약한 엄마와 동생이 걸어온다.
벚꽃잎이 바람에 흩뿌려지고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집에 돌아와 과일을 먹는데 엄마가 이야기 하신다.
"야이, 나는 거기 산책로에. 야들, 초등학교 5학년때 가보고 한번도 안가봤데이.
오랫만에 가봤는데 많이 바꼈데. "
광역시도 아니고 조그만 지방도시에 살면서 이렇게 잘 만들어 놓은 산책로를 17년 동안이나 가보지 못했다는 말에 엄마가 가여워진다. 운전면허도 없는 아빠 덕에 항상 집, 시장만 오가며 살아온 그녀에게 꽃놀이나 여행은 티비 드라마에나 나오는 모습이었겠지.
내가 이 집에 들르지 않았던 그 시간동안 엄마도 내게 무언가 미안함이 있었을까.
우리 두 아이들에게 한없이 퍼주려고만 한다.
"야이, 뭐 줄까. 견과류 들어온거 있는데 가져갈래? 인형 가져가. 그거 애들이 안 해여. 가져가."
마음이 녹아내린다.
사실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 이제 기억도 안 난다. 아팠던 감정? 마음?
그또한 희미하다.
굳이 붙잡고 살면서 엄마를 나쁜 사람 만들어 가며 나를 영웅처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사라져만 간다.
"자고가지 왜."
처음 듣는 말이다. 늘 손님치루듯 후다닥 헤어지기 바빴던 우리에게, 한번도 자고 가란 말을 않던 엄마가
처음으로 말을 한다.
"자고 가라"고.
용돈봉투를 건네주고 돌아서는데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어색한 듯 말을 이어가신다.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여. 밥도 사주고."
아빠는 우리 두 아이에게 깊은 포옹을 해 주신다.
인사를 하고 차에 타 오는데
식당에서 아빠가 했던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나중에, 음.. 나중에...
애들이 더 크고 나중에,
직장일을 하느라고 지쳐있는 건 알겠지만 자꾸만 미루고
아이들 곁에 없으면
나중에 후회가 그키 남는다고.
애들 클때 같이 있어줄걸. 이카면서.
그러니까 지금 애들 곁에 있어주라고. 응?"
다른 테이블에 있었지만 그 말은 내 귀에 들리라고 하는 건지 유독 컸다.
아빠도 미안해 하고 있는 걸까.
지독하게 후회하며 몸서리 치긴 했을까.
유독 아빠를 좋아하고 따랐던 다섯살 짜리 아이를 떠올리면서
미안함에 가슴을 치며 울어본 적이 있었을까...
24년 4월,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향해가는
남아있는 날들동안
엉켜있던 응어리들을 풀고
그들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려 한다.
저마다의 삶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새엄마 당신의 삶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