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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5월 12일 후끈후끈

20개월 5일

by 마이문

우주가 서방구 출근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우리 집 현관은 어떻게 해도 소리가 요란스럽다. 조용히 문을 열기란 불가능하다. 누가 발명했는지 모르겠으나 문을 열고 닫는 편의만 생각했지 집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며칠 째 우주의 밤 수면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일찍 깬 탓에 계속 졸려하다가 아침 외출 후에 돌아와서 10시도 되기 전에 잠들었다. 오늘의 아침 외출은 버스투어가 되었다. 근래에 한참 유모차를 너무 사랑하더니 오늘은 또 어쩐 일인지 그냥 걸어 나가겠다며 유모차를 거부했다. 아파트 초입까지 슬슬 걸어 나가니 기관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엄마들은 정답게 안부를 묻고 아이들은 모두 킥보드를 타고 빙글빙글 돌았다. 우주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음 코스로 선택한 것이 버스였다.


우리가 탈 만한 버스 노선이 있는지 얼른 검색했다. 화성시 마을버스 중 하나가 마침 주민센터 앞으로 가는 게 있었다. 코로나 지원금을 받으려면 주민센터에 가서 신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이나 내일 중에 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가 타려는 버스는 8자를 그리며 동네를 순환하는 노선을 달린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우주가 다음에 또 버스를 타고 싶다고 하면 딱히 갈 곳이 없을 때 이 버스를 이용하면 되겠다고 생각만 했는데, 기사님은 생각을 현실로 만드셨다. 다시 집 앞 정류장으로 돌아오기 직전의 정류장에 내려야 하는데 하차벨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시는 게 아닌가. 탔을 때부터 급정거와 급출발에 과속까지 난폭운전을 하시더니. 우리가 버스를 '그냥' 탄 거라고 생각했나. 아님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걸까. 매우 불쾌해서 민원 넣으려고 천장에 붙어있는 버스와 기사 정보를 사진 찍어 왔다.


주민센터는 못 가고 강제 귀가를 당했다. 그렇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우주가 내리자마자 내 품에 폭 안겨 기대어 잘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눕혔더니 몇 번 뒤척이다 금세 잠이 들었다. 오늘은 식사준비를 뒤로 미루고 서재로 들어가 책을 꺼내 들었다. 5월의 시작과 함께 동생이 빌려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와 감동이 쉴 새 없이 마음을 치고 들어온다. 오늘은 어린이를 대하는 어른의 태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작가가 소개한 일화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아빠와 아이가 서점 계산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빠는 책을 계산해야 하니 아빠에게 책을 달라고 하고 아이는 싫다고 버티는 것이다. 그때 계산대의 점원이 아이에게 "따로 계산해드릴까요?"하고 물었다고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둘이 원만히 합의 보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을 테고, 아니면 어서 아빠에게 책을 주라고 말했을 수도 있는데. 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일화다.


책을 읽으면서는 엊그제 놀이터에서 만난 어린이들이 생각났다. 네 명의 어린이가 시소를 재미있게 타고 있었다. 우주보다 더 어린것 같은 아기가 시소에 올라타고 싶어 했는지 한 아이가 잡고 있는 손잡이를 같이 잡고 앉아있었고, 우주도 그걸 보더니 자기도 타야겠다고 달려갔다. 혹시 민폐가 될까 봐 아이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그랬다. "저희가 살살 탈까요?" 너무 고마워서 내가 잘 잡을 테니 타고 싶은 만큼 세게 타도 된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신경이 쓰였는지 엄청 조심스럽게 발을 굴렀다. 아이들 중 아무도 아기 둘이 온 것 때문에 불쾌해하지 않았다. 사려 깊은 눈빛이 초등학생쯤 되었나 싶었는데 모두 7살이었다. 그 사실에 한 번 더 놀라고, 같이 타고 있던 아기의 엄마에게 아기가 몇 살인지 묻고 자기 동생도 그쯤 되었다며 조잘조잘 대화를 이어가는 것에 또 놀랐다. 너무 예쁜 마음이다. 내 마음이 정화되었다.


그리고 일기를 쓰면서는 오늘 이케아와 아울렛에서 만난 어른들이 생각난다. 오후에 일어나 밥을 먹고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하던 우주가 응가 이후 컨디션을 회복하고 이케아에 가겠다고 했다. 넓은 공간에서 카트를 밀고 한참 돌고 돌며 행복한 시간을 가진 후에 나가기 전 식품 코너에서 음료 하나를 사들고 계산하려는데, 카드기에 꽂아둔 카드가 탐이 났는지 우주가 손을 뻗자 계산대의 직원분이 지금 빼면 안 된다고 다급하게 우주를 말렸다. 급한 마음에 쏘아붙인 듯이 말한 게 맘에 걸리셨는지 얼른 몸을 앞으로 빼시고는 우주와 눈을 맞추어 차근차근 설명해주시고 이제 빼도 좋다며 우주가 카드를 뺄 수 있도록 알려주셨다. 사실 소통이 되는 월령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도 모를 텐데 우주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것에 감동받았다. 이어서 아울렛의 기차 기관사님도 우주가 카드를 가지고 머뭇거리자 자신에게 줄 수 있도록 천천히 가르쳐주셨다. 아이들은 이렇게 작지만 큰 배려 속에서 사회가 살만한 곳이라 여기며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다른 어린이들에게 정중한 태도로 대하는 어른이 되어야지. 쉽지 않다. 어린이는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에 그렇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달린 화면을 통해서 짤막한 뉴스를 접하곤 하는데, 초록우산에서 '-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만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어린이를 비하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가벼운 장난 같은 건데 유난이다 생각했다. 책을 통해 어린이라는 세계에 들어가 보니 아차 싶다. 쓰면 안 될 것 같다. 어린이들이 스스로를 미숙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단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이미 지나왔으니 쉽게 여길 수 있지만 어린이들은 자신을 어린이로 여기기 전에 한 인간으로 존중받기를 원하는, 그러니까 결국 우리와 똑같은 존재이지 않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다가올 우주의 어린이 시절이 기대가 된다. 물론 낱말의 뜻만 놓고 본다면 지금도 어린이지만, 누군가 우주를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라고 지칭하게 될 그 시절 말이다. 그때까지 나도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를 갈고닦아 우주를 맞이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루 동안 이케아와 아울렛을 둘 다 방문하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작년 언젠가 그렇게 해보려다가 우주의 낮잠과 수유 텀 때문에 눈치 보다 진이 빠져서 그 뒤로 다시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뭐 마음만 먹으면, 체력만 허락하면 언제고 가능해졌으니 우주의 성장이 또 새삼 신기하게 다가온다. 둘 다 나도 너무 좋아하는 곳이다. 매일 가라고 해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분주하게 해치워야 할 미션이 없어서 정처 없이 떠돌며 공간이 주는 분위기를 한껏 마시고 왔다. 이케아에서는 우주를 따라다니며 여기가 왜 좋은가 가만히 떠올렸다. 좋은 이유가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중에 가장 좋은 건 물건을 구경하면서 우리 집을 떠올리며 여기는 이걸 버리고 저기는 저걸 치워볼까 하며 실행하지는 않을 상상을 마구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울렛의 기차를 이틀 연속 타면서 요금이 비싸서 아까운 것 말고는 우주만큼이나 나도 기차 타는 게 굉장히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 카트도 기차도 어릴 때 못해본 것들이다.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는 어린 내가 환호를 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차에 또 타고 싶은 우주가 통제할 수 없이 튀어나가려고 해서 카페에 앉자마자 아이스 라떼를 원샷 때린 것만 조금 아쉬웠다.


아, 벌써 두 시가 넘었다. 내일은 바쁜 하루가 될 것 같다. 코로나 지원금을 내일은 꼭 신청해야지. 쌓인 빨래도 처리하고 모레 떠날 작은 여행을 위해 장도 보고 짐도 싸야 한다. 이제 자자! 금요일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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