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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5월 11일 걷기에 좋은

20개월 4일

by 마이문

오후에 커피를 마셔보자는 아이디어가 며칠 전에 떠올랐다. 혼자만의 시간을 향한 갈망으로 몇 달째 성공하지 못한 아이디어만 내고 있었다. 우주를 일찍 재우는 것도, 내가 일찍 일어나 보는 것도 모두 처참히 실패하고 한동안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뇌가 가동을 멈췄었는데 최근, 기억이 안나는 어느 날에 늦게 커피를 마시고도 어려움 없이 잠에 빠진 경험을 하고 나서 떠올린 아이디어다. 원래는 점심 이후에만 마셔도 밤잠이 영향받는 편이라 가뜩이나 피곤한데 잠이 안 오는 게 너무 괴로워서 피했었다. 카페인을 이길 만큼 몸이 피곤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커피와 상관없이 잠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몇 번 실험해보니 잠이 안 올 것 같은 기분은 들지만 곧 잠에 빠진다는 걸 확인했다. 그래도 그 '잠이 안 올 것 같은 기분' 때문에 우주를 재우려 곁에 누워있다가 눈을 감아도 기절하듯 잠들지 않는 효과가 있는 게 아닌가. 오늘도 우주가 잠들고 한참 배 마사지를 해주다가 얼른 일어나 씻고 설거지도 하고 이렇게 일기도 쓰고 있다. 언젠가는 내성이 생길지도 모르니 일단 될 때라도 즐기자.


가습기 효과인지 우주가 새벽에 깨지 않고 잘 잤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모르겠지만 근래에 저녁과 비교해보면 아침과 점심에 유독 밥 먹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원인을 찾아보다가 내린 결론은 잠에서 깨고 난 후에 입맛이 돌아오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는 것. 배가 고프면 눈 뜬 직후에라도 잘 먹던 우주였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점심 즈음 낮잠에 들어서는 2-3시에 일어나서 밥을 먹어야 하는 패턴도 며칠 지속되어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오늘은 기필코 잠들기 전에 밥을 먹이자는 일념으로 아침은 과일과 팬케이크로 간단하게 대체했다. 적게 먹어서 일찍 배가 고파지니 점심을 제 때에 맛있게 먹었다. 오늘은 낮잠시간이 조금 뒤로 밀릴 듯해서 먹은 것을 후딱 치우고 아울렛에 다녀왔다.


서방구가 새로 산 안경테의 안경알을 교체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는데, 오늘은 마침 수요일이라 아울렛 광장의 기차가 운행하니 우주를 태워줄 수 있을 것이고, 돌아오는 길에 무조건 잠들 타이밍이라 낮잠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지 않아도 되니 오후에 친구 집에 다녀오기로 한 스케줄과도 딱 맞아서 1석 3조였다. 도착하자마자 안경을 맡기고 기차를 타러 갔다. 기관사 아저씨가 자리를 비우셨는데 기차 문이 모두 활짝 열려있어서 기다리는 동안 우주는 원 없이 기차를 구경했다. 3분 정도 짧게 운행하는 기차 안에서 우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재밌었는지 다시 타고 싶다고 했지만 3분에 6천 원은 너무 가혹한 금액이라 엘리베이터를 핑계로 기차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다른 층에 있는 회전목마도 들렀다. 1시부터 점심시간이라는 푯말을 설치하고 계셔서 보니 4분 전이었다. 다행히 우리를 보시고 태워주셨다. 회전목마도 한 번이면 만족하고 내렸었는데 오늘은 더 타고 싶다고 했다. 졸린 게 분명하다. 아저씨가 식사를 하셔야 해서 말이 쉰다고 설명해주었다.


안경을 찾아서 돌아오는 길에 역시나 잠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서 무사히 깨우지 않고 침대로 옮겼다. 간식을 챙겨 먹으며 설거지와 집 정리를 마쳤다. 정리한 거실이 다시 어지러 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져서 치우기가 너무 싫다. 그래도 치워야 한다. 안 그러면 너무 어지러워서 우주도 자기가 뭘 가지고 놀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언젠가는 같이 정리하겠지. 언젠가는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장난감을 꺼내겠지. 집안일을 마치고 책을 조금 읽어 보려는데 우주가 일어났다. 잠시라도 지체하면 배고파할 것 같아서 얼른 데리고 나왔다. 마트에 들러서 앤티앤스 프레즐을 사들고 근처 사는 친구 집으로 향했다. 또 오랜만이라 친구의 아기가 얼마나 컸을지 궁금했고 친구가 보고 싶었다. 근처에 살아도 생각보다 많이 만나지는 못하는데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정말 자주 보는 거다. 1년에 두 번 보면 많이 본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우주와 거의 1년 차이 나는 친구의 딸은 그새 또 많이 커서 새로운 얼굴이 보이기도 하고 눈빛도 달라져있었다. 우주와 나를 계속 빤히 바라보고 특히 우주가 뭔가를 하는 것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보행기를 타고 우주를 쫓아가는 게 너무 귀여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아기들의 관계는 어떤 모습이려나. 궁금함을 품을 수 있는 지금 이 시기가 정말 소중하다. 친구 아기는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워서 새로운 사람을 보면 낯을 많이 가린다고 했는데 그래도 나한테는 이 정도면 안 가리는 편이라고 하니 기뻤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앉아서 눈도 많이 맞추고 싶었는데 우주랑 같이 가면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다행인 건 친구 집에 있는 동안 우주가 심심해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제법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기도 하고 몇 번 와 보아서 익숙한지 집안 이곳저곳을 알아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간식도 오며 가며 충분히 먹어서 집에 갈 때까지 배고프다고 칭얼대지도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이모네서 좋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주에게 다음번에 또 가자고 해도 가겠다고 할 것 같다. 이만하면 성공적이다.


그렇게 무사히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씻는 것이 내가 세운 계획이었는데 우주에게는 다른 옵션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는 길에 내가 운전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는지 운전대를 잡아보겠다고 해서 주차장에 한참 머물렀다가 간신히 엘리베이터까지 탔는데, 이번에는 현관 밖에 서서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순간 밥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밥만 만들고 나가자고 우주를 설득하고 후다닥 쌀을 안치느라 날씨도 모르고 반팔인 채로 우주와 밖을 나섰다. 찬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온몸의 혈관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지만 용감하게 바람과 맞서 열심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초록불이 되면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너무 즐거운 우주에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밤 산책이었을 거다.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주의 행동에 대한 허용과 제한을 주제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부터 제한할 것인가. 내 체력이 닿는 한은 위험하거나 자원이 낭비되거나 남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면 일단 하고 싶은 대로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두기로 했다. 오늘 처럼 횡단보도를 그저 좋아서 계속 건너보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모르기 때문에 제 멋대로 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기를 우주가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내 품 안에 있는 동안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날이 오면 지금 만족해본 경험이 우주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생각과는 다른, 새로운 스케줄이 우주로 인해 계속 생기게 되더라도 마음을 열어 같이 즐기는 한 해를 보내고 싶다. 벌써 내년부터 어린이집에 들어가면 작은 사회에 속하게 될 테니. 체력을 더 기르자. 화를 더디 내도록 마음을 건강하게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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