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 10일
우주와 짧은 서울 여행을 하고 돌아온 터라 다리가 부서질 것 같고 굉장히 피곤했는데 기분은 한껏 상기되어 서방구와 밤 맥주까지 달렸다. 그리고 일기를 어제도 쓰지 않은 게 자꾸만 떠올라 핸드폰을 열었다. 오늘 진짜 재밌던 날이니까. 기록해야지. 내일은 내일의 내가 버틸 것이야.
페이크미라는 안경 브랜드를 작년에 알게 되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산책할 때 선글라스를 쓰고 싶은데 렌즈를 챙겨 낄 이유도 여유도 없어서 안경테에 선글라스를 탈부착 하는 클립온 타입을 사고 싶었다. 하나에 꽂히면 파고 파는 성격이라 클립온 제품을 웹에서 있는 대로 뒤졌다. 그러다가 찾게 된 브랜드가 페이크미였고, 제일 맘에 들었지만 예산상의 문제로 작년에는 사지 못했다. 같은 계절이 돌아오니 스물스물 같은 마음이 피어올라 생각이 날 때마다 29cm에 들어가 서 상품페이지를 보고 또 보고. 옵션이 많은데 어떤 게 잘 어울릴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아서 쇼룸이 있나 찾아봤더니 압구정로데오역 근방에 있다고 나왔다. 동탄에서 수서로, 수서에서 압구정로데오로 가면 1시간 이내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지난주 부터 각을 쟀다. 언제가 좋을까. 주말에 또 다시 쇼룸까지 경로를 여러 번 검색하다가 지금 페이크미에서 샘플세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무려 전품목 5만원! 보자마자 이번주에 꼭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오늘 아침 9시까지 늦도록 자더니 개운하게 일어난 우주를 보고 오늘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닭가슴살멸치주먹밥을 해먹고 SRT를 예매했다. 내가 먼저 나갈 준비를 마치고 우주 옷을 입히고 나가서 먹을 밥과 간식을 챙겼다. 물까지 넣으니 가방이 돌덩이 같았다. 역 까지는 버스로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늦어서 차를 끌고 갔다. 긴장됐다. 이 작은 아기와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을까. 내가 하기로 해놓고 내가 긴장하는 꼴이라니.
다행히 우주는 기차도 지하철도 투정없이 잘 타주었다. 대부분 안겨있었지만 환승 구역에서 혼자 걸어가기도 했다. 지하철에서는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노약자석을 양보해주셔서 지친 몸을 잠시 쉴 수 있었다. 최근에 청담의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에 취업한 사촌동생에게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와 스토어가 가까워서 잠시 들르겠다고 연락했었는데, 마침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막 점심시간이 시작되어서 같이 점심 먹을 수 있겠다고! 이게 웬일인가. 짜고 쳐도 이런 그림은 못 그릴 거다. 우주가 좀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맥도날드로 향했다. 같이 햄버거를 먹고 우주도 싸온 도시락과 감자튀김을 먹었다. 둘이서 어떻게 점심을 해결하나 했는데.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견뎌내며 우주를 안고 쇼룸으로 향했다. 무거운 가방과 우주까지 들고 있으려니 10분거리가 1시간처럼 느껴졌다. 쇼룸 앞에 도착하자 오아시스를 만난 듯 마음이 시원해졌다. 난동을 부리기 직전의 우주를 달래가며 사려던 제품을 착용해보았다. 테는 사려던 것 말고 다른 버전이 더 어울렸고, 골드나 로즈골드는 오히려 나의 누런 피부가 더 부각되어서 실버가 가장 잘 어울렸다. 대망의 클립온. 가장 사고 싶은 색은 호박색이었는데 안경테를 실버로 고르니 뭔가 안어울리는 듯 해서 무난하게 투명으로 골랐다. 인터넷에서 사려면 싸게 사도 20만원인데 샘플 세일로 8만 3천원에 데려오게 되었다! 만세!
시몬스 팝업도 구경하고 사촌동생 일하는 것도 볼 겸 온 길로 다시 돌아가 맞은 편 동네로 향했다. 가는 길에 우주는 내 품에서 곤히 잠들었다. 스토어를 구경하고 동생도 보고 굿즈도 사고 다시 나와서 버스를 탈 때까지도 깨지 않고 잘 잤다. 2층 버스를 타려고 환승 정류장에 내려서야 눈을 떴다. 매일 타고 싶다고 '이층, 이층!'을 외치던 우주는 2주만에 버스를 다시 만났다. 집으로 오는 내내 자리에 잘 앉아 있어줘서 고마웠다. 도착해서 내리자마자 2층 버스 문이 닫히는 모습을 감상하게 해줬다. 다시 타고 싶다고 했지만 잘 가라고 인사해야 한다고 설명하니 아쉬운 듯 손을 흔들었다.
역에 둔 차를 가지러 지하 통로로 가다가 인생네컷을 발견했다. 우주랑 오늘을 남기면 좋을 것 같아서 얼른 들어가 후다닥 찍고 나왔다. 너무 예뻤다. 그길로 마트로 향해서 장을 보고 안경알을 맞췄다. 세탁소에 맞겨둔 패딩도 찾았다. 뭔가를 정말 많이 한 날이구나. 집에 와서 콩나물 국을 끓이고 돈까스를 튀겼다. 같이 저녁 먹고 씻으니 서방구가 집에 왔다. 참 길고도 짧은 하루였다.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여행을 위해 혼자 피드백을 해봤다. 아기띠는 허리에 차는 힙시트를 챙기는 게 좋겠다. 가방도 백팩으로 들고 가야지. 바지는 이제 무조건 반바지를 입어야겠다. 유모차를 안가져 간 건 아주 잘한 일 같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 역을 봤기 때문이다. 아무튼 졸음이 쏟아진다. 방금 잠들 뻔했다. 이제 자야지. 서울 좋다. 우주랑 자주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