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 10일
일기 매일 쓰기가 이렇게 어렵나. 으아. 우주가 너무 늦게 자서 다 같이 누웠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절했다. 오늘도 맥주 먹기로 했는데. 다행히 잠들기 전부터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던 나는 새벽에 눈이 떠졌고 양치까지 했더니 졸음이 조금 달아나서 일기를 남길 수 있게 됐다. 매일 날씨를 제목에 달고 있는데 '뿌옇다'는 단어가 새삼 너무 귀엽다. 어쩜 생긴 것도 발음도 먼지가 가득한 느낌을 이렇게 잘 표현할까. 그리고 날짜를 적다가 오늘이 5월 18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스타를 하고 있었다면 오늘을 기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것의 순기능일까?
아침에는 이케아에서 세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우주가 적당한 놀이를 찾아내길 기다렸다가 가방을 들고 우주의 미니 텐트에 들어가고 나오는 놀이에 참여했다. 이케아에서 파란 가방의 미니버전을 사줬더니 너무 좋아한다. 그걸 들고 나도 가방 하나를 들게 하고선 자기 텐트에 들어갔다가 누웠다가 다시 나와서 거실로 갔다가 하는 걸 반복했다. 그 사이에 내 역할은 상황극을 끊임없이 해주는 일. 오늘은 캠핑에 왔다는 둥, 제가 먼저 집에 가보겠다는 둥, 오늘은 뭘 사러 가시냐고 묻거나 잠자기에 너무 좋은 텐트라고 캠핑이 재밌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우주가 더 놀이에 심취한다. 한두 달 전에는 내가 그렇게 해도 별 감흥은 없어 보였는데. 또 많이 컸다.
요즘은 추임새나 효과음을 따라 한다. 띡, 삑, 띵동, 땡과 같이 기계에서 나는 소리나 우리가 아야, 헤이, 아우, 야 하면 씩 웃다가 따라서 소리를 낸다. 알파벳 사운드 패드가 있는데 그걸 매일 누르더니 제법 보고 소리를 낼 수 있는 알파벳이 생겼다. 케이, 엠, 엔, 비, 에이는 확실히 안다. 알파벳을 읽을 줄 안다는 건 며칠 전 밤 산책에서 우리 아파트 건너의 오피스텔 꼭대기에 커다란 M이 쓰여있는 간판을 보더니 엠!이라고 외쳐서 알게 되었다. 설마 저걸 읽은 건가 싶어서 다시 물었는데 똑같이 외치더니 그 뒤로도 자기가 아는 알파벳을 몇 개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부모가 자식을 천재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기는 배운다. 우리 집 뒷쪽 창문에서도 그 M이 보인다는 걸 알게 되는 바람에 밤마다 목마를 태워 M을 보여줘야하는 루틴이 생겼지만 내가 귀찮아 하면 그 날의 감탄이 무색해질 것 같아서 또 보여주러 간다. 그것도 며칠 지나면 잊어버리고 안하는 날이 올 거다.
아까 저녁에 서방구가 나더러 여유 있어진 것 같다고 했다. 맞다. 몇 주 전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뒤로 마음이 계속 평화롭다. 나도 모르게 툭툭 날 세운 말을 서방구에게 던지던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 하다. 우주와 보내는 시간도 생각하면 아쉽고 눈 부시게 아름다워서 몸이 고되어도 마음과 눈은 빛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주도 나도 모두 성장하기 때문이다. 어제 서울 가는 기차 안에서 느낀 건데, 우주가 이제는 내 말을 듣고 자기를 통제해보는 능력이 생겼다. 15개월 즈음에도 기차에 같이 탄 적이 있는데 그때의 우주는 통제가 불가능했다. 계속 자리를 벗어나 복도를 걷고 싶어 했는데, 말로 타이르기가 불가능했던 기억이 난다. 어제는 기차에서도 오는 길의 버스에서도 조금 움직이고 싶어도 내 말을 듣고 가만히 잘 앉아서 왔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교감 말고도 더 정교한 커뮤니케이션 기능이 생긴 거다. 내가 받던 스트레스가 훨씬 적어지게 되었고 업그레이드된 소통방식 때문에 이 관계가 더 즐겁고 애틋해지게 되었다.
벌써 목요일이 왔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 그만큼 나는 더 우주를 대하는 마음을 정교하게 갈고닦아야 한다.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니까. 내일도 힘을 내자! 그리고 건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