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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5월 21일 아직도 선선한 바람

20개월 14일

by 마이문

대전에 왔다. 10시에 떠나면 무난하게 2시간 내로 내려올 수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오늘은 3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제 속도를 못 내어 더딘 것이라, 답답하고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서방구가 내내 더 일찍 나오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을 반복했을 텐데 오늘은 기꺼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말은 안 해도 고단했는지 맥주를 먹고 자겠다더니 우주랑 같이 기절해서는 코 골며 자고 있다. 여전히 선선한 밤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밤이다.


대전에 오기 전까지 마음이 엄청 들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대전 일정을 생각하면 내내 마음이 부푼 풍선 같았다. 이럴 때면 대전에 다시 내려가 살고 싶기도 하지만 멀리 떨어졌으니 소중하다고 느껴지겠지 생각하면 또 이 정도 거리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우주가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만나는 시간이 요즘은 너무 소중하다. 살면서 그 시간보다 더 의미 있는 순간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들이 그렇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다.


사촌들 중에서도 나와 동생은 조부모님의 사랑을 유독 많이 받았다. 할머니에게 우리 아빠는 애틋한 첫째 아들이었고 할아버지에게 우리 엄마는 제일 예쁜 며느리였다. 나는 또 아들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손주가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 댁과 우리 집이 거리상 가장 가까워서 명절이 아닌 날에 놀러 가기도 하고 명절에는 다른 식구들보다 무조건 하루 먼저 가서 잤다. 자주 보면 더 정이 간다. 몰래 우리만 선물을 챙겨주시던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찾아봬면 용돈과 음식을 꼭 들려 보내신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발길이 갈 수밖에 없다. 도리를 다하러 할머니 댁에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아직도 사랑받는 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찾아간다. 그분들이 내게 주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로 알기 훨씬 전부터 감각으로 느껴왔을 것이다.


결혼하고 나니 내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희생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시댁에 친정 가듯 우리를 데리고 찾아뵙는 것, 누가 그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 큰 며느리도 아닌데(두 분은 재혼하셔서 할아버지의 큰 아들이 우리 아빠보다 형이다.) 명절 음식을 위해 장을 혼자 다 보고도 생색 한번 내지 않은 것. 나는 그것의 발끝도 쫓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왜 이렇게 미련하게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우주를 낳고 나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사랑을 흘려보내 주려고. 엄마의 헌신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사랑이 흘러가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두 분의 사랑은 나에게 삶의 기반이다. 사는 내내 곱씹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힘이 된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냥 '나'라서 받는 사랑이라 그렇다. 진하게 경험한 그 사랑을 우주도 받았으면 좋겠다. 나와 서방구가 주는 사랑과는 다른 조건 없는 사랑. 그것은 우리들의 부모님만 줄 수 있는 사랑이다. 우주가 그것을 충분히 받고 무한히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자라나며 받은 사랑으로, 사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이 세상에서 단단히 서있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좋겠다. 그런 바람 때문에 나도 엄마가 그랬듯 우주가 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더 많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계속 기회를 노리게 된다.


지난달부터 할머니를 할미, 할아버지를 하삐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우주는 더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게다가 연상 능력이 좋아져서 아버님이 어린이날 선물로 사놓으신 경찰 오토바이를 보고 할아버지가 사주셨다고 말하기도 하고, 우리 엄마가 늘 보리차를 끓여주니 그 물을 먹을 때마다 "할미"하고 말하기도 하니 어른들은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우주보다 더 아기같이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그러니 자꾸 우주를 더 보여드리고 싶다. 그럼 행복하실 테고, 행복하니 우주를 더 사랑해주실 테고. 나는 그 모든 선순환을 보며 제일 행복할 거다.


이번 대전 일정에서도 모두와 좋은 기억을 만들고 가야지. 우주는 길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잘 기록하고 기억해서 자주 이야기해줘야지. 서방구의 코 골이가 멈췄다. 이제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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