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2년 5월 23일 구운 오징어가 될 것 같은 햇살

20개월 16일

by 마이문

3시 반쯤 수서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리쬐던 햇빛을 잊을 수가 없다. 양산으로 몸 전체를 가려줬는데도 우주의 두 볼이 빨갛게 되었다. 내 몸이 볕에 익고 있지는 않을까 싶었다. 택시에 탔는데 열기가 창문을 뚫어 말을 잃었다. 우주가 이것저것 보며 신기해서 막 떠드는 말에 반응할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뜨거운 볕은 오늘 그때가 마지막이었다는 사실.


잠실의 한 은행에서 일하는 사촌동생과의 만남이 오늘 서울 방문의 이유였다. 코로나 이후로 3년간 만나지 못했는데 지난주에 카톡을 하고선 또 나중에 보자고 미루면 시간만 갈 것 같아서 얼른 약속을 잡았다. 동생은 큰집의 둘째 딸이고 첫째는 나와 동갑이다. 본가에 있는 첫째도 부르겠다고 했고 나는 대전에서 내 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두 자매가 만나게 되었다.


실적이 필요한 동생이 우주의 청약통장 발급을 부탁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딱히 지금 내가 발급받아야 할 상품은 아니어서 완곡히 거절 비슷한 의사를 밝혔는데도 훅 들어오는 부탁에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서방구와 상의하며 고민했다. 해주기 싫어서 고민이 되는 건가 했는데, 해주기 싫기도 하고 해주고 싶기도 해서 고민이 되는 거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건데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나 싶다가 얼마나 급하면 그러겠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한 가지만 묻고 결정하기로 했다. 내가 통장을 만들면 너에게 큰 도움이 되겠느냐고. 솔직한 동생이라 간결하고 명확하게 '맞다'는 답장이 왔다. 뭐라도 나한테 도움이 된다는 식의 변명이 왔다면 싫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텐데 확실한 답을 듣고 나서 동생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기꺼이 해주자는 마음이 갑자기 확 커졌다.


영업시간이 끝날 즈음 도착하게 되어서 닫힌 은행 안쪽으로 들어가 회의실인지 VIP실인지 아무튼 뷰가 끝내주는 방에서 통장 발급도 하고 푹 쉬었다. 동생이 퇴근할 때까지 어디서 시간을 보낼지 막막했는데 다행이었다. 우주까지 다섯이서 편안히 시간을 보내고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이상하게 어제 만난 것처럼 익숙했다. 정말 쉴 새 없이 먹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사실 이렇게 어른들 없이 우리끼리 만난 건 처음인데 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친척 모임은 1년에 4번이었다. 멀리 사는 친구들보다 더 자주 만난 셈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볼 수 있었으니 애틋함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얼굴 보니 너무 좋고 신이 나서 그간 많이 그리웠구나 깨달았다.


우주가 너무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해야 해서 8시 기차를 끊어두고 사촌동생이 사는 집에 잠시 들러 집 구경도 하고 미리 사뒀다는 우주의 선물도 받았다. 마음이 참 고마웠다. 마침 내가 사줄까 고민했던 듀플로 목욕놀이라서 더 반갑기도 했다. 짧고 굵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다. 동생이 소화가 안되어 괴로워하다 잠들었는데 괜찮은지 걱정이 된다. 우주는 비교적 나이스 하게 잠들었다. 목욕도 깔끔하게 해 줘서 맘이 편하다. 오늘 처음 선크림을 발라 준 날이라 집에 오는 내내 씻겨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우주와의 여행은 일정을 짧게 잡아야 해서 좋다. 나는 체력과 시간을 계산하는데 둔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서 혼자 어딘가로 떠날 때 늘 무리한 일정을 짜곤 했다. 우주는 아기라서 너무 피곤하지 않을 만큼의 외출만 해야 하니까 거기에 맞추다 보니 내 체력의 한계치가 딱 그만큼이라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다음은 어디로 떠나볼까? 12시에서 4시 사이의 햇볕만 피할 수 있다면 아직은 더 돌아다녀도 될 것 같다.


마음이 꽉 차고 따뜻한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22년 5월 22일 여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