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개월 23일
역사적이고도 비현실적인 하루였다.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우주를 재우다 잠드는 바람에 아득해졌다. 숨을 고른다. 다시 떠올려보자.
우주가 어린이집에 등원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른 타이밍이다. 둘째 없고 직장 없는 3순위 엄마에게 어린이집 보내기란 하늘에 별따기인 이곳에서, 올해도 가망이 없으면 한 해 더 데리고 있자 했는데. 어린이랑 놀고 싶다는 우주의 말에 우리도 가망이 있어 보이는 어린이집을 그야말로 뒤져서 찾아냈다. 지난밤에는 긴장돼서 자꾸만 잠이 깼다. 우주가 너무 울면 어쩌나. 그래도 돌아서서 나와야 할까. 아니면 그냥 데리고 나올까. 선생님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실까. 하지만 오늘 아침, 우리 모자는 씩씩했다.
우주는 입구에서 원장님을 마주치자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눈으로만 사람을 볼 텐데, 원장님은 아무래도 눈빛이 조금은 무섭다. 아니면 상담하던 날 교사실에서 작동한 프린터기 소리에 놀란 마음 때문일까. 그래도 들어가 보자며 우주를 부추기자 몇 걸음 더 떼서 문 앞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어린이집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우주 뒤통수에서도 느껴졌다. 교실마다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자 우주는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에는 지난번 오티 때 뵀던 선생님 두 분이 계셨다. 괜히 반가웠다. 우주는 처음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입구에서 처럼 우주 이름이 적힌 사물함을 발견하고 경계를 허무는 듯했다. 이내 좋아하는 파란 블록을 발견했다. 블록이 담긴 통에 아이들이 모여있었는데, 자꾸만 나를 돌아보면서도 가까이 다가갔다. 우주를 두고 바로 나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딱히 제지하지 않으시고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두셨다. 10분 정도 지켜보다가 우주에게 시침이 11에 가면 엄마가 다시 올 테니 친구들과 재밌게 놀고 있으라고, 너무 보고 싶으면 엄마에게 전화해 달라고 선생님께 말하라고 했다.
바람이 맑고 차가웠다. 생각해 보니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날은 늘 그런 날씨였다. 3월 2일이 무언가 새로워지는 날처럼 느껴본 지가 언제인지 잠시 떠올렸다. 우주를 타인에게 맡기고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슬프지 않았다. 나도 우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파란 블록을 모으고 있는 우주에게 파란색을 더 찾아 건네주려던 친구, 우주가 파란색을 달라고 말하니 우주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친구의 눈빛이 생각났다. 엄마와 떨어진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아이를 엄마처럼 품에 안고 있던 선생님의 모습도 생각났다. 내가 마음이 놓인 건 다 그 때문이다.
약국에서 식염수도 사고 길 건너 카페에 앉아 커피도 마셨다. 챙겨 온 책을 펼쳤다. 짧은 글로 이어진 책을 들고 오길 잘했다.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좋다.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읽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11시가 되기 5분 전에 다시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너무 이른가 싶어 문 앞에서 잠시 서성였다. 벨을 누르니 선생님이 우주가 집에 갈 수 있도록 채비해서 내보내주셨다. 우주 가방에는 이름표와 출석 태그가 달려있었다. 선생님은 우주가 혼자서도 장난감을 잘 찾아내서 놀았다고 말씀하셨다. 우주 손에 들린 파란 풍선이 왠지 기념품 같아서 입구에 세워놓고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성공이다.
트레이더스에 가고 싶다는 우주를 데리고 집에 오는 길에 잠시 들렀다. 우주는 우주대로 나는 나대로 즐거운 쇼핑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여느 때와 같은 일과를 보냈다. 그러나 마음은 새로웠다. 소식을 기다리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우주가 잘 다녀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모두가 대견해하고 기뻐했다. 넘치도록 감사한 출발이다. 새 출발의 활기찬 기운에 찬 물을 끼얹은 건 서방구의 코로나 확진 소식이었다.
월요일 출장에서 같이 회식했던 사람 중 하나가 코로나에 걸려서 집으로 돌아오던 화요일부터 서방구는 계속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생활했다. 혹시나 했는데 오늘 증세가 있어 회사에서 자가키트로 검사했더니 희미한 두 줄이 뜬 것이다. 저녁까지 해결하고 들어온 서방구를 바로 서재에 격리시켰다. 우주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잘 지내라고 하라는 내 말을 따라 하며 아빠에게 인사했다. 가끔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열어보라고 하기도 했지만 나오라고 떼를 쓰진 않아서 다행이다.
순간순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두려움이 몰려와서다. 서방구나 나는 아파도 상관없다. 이미 겪어봤고 우리는 최근에 백신도 맞았다. 그런데 우주가 아픈 건 무섭다. 그건 겪어봤어도 또 무섭다. 내 목이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느낄 때마다 불안했다. 도망칠 곳이 없으니 더 울렁이는 것 같았다. 좀처럼 마음을 다스릴 수 없어 더 무서워질 때쯤 우주랑 잠이 들었다. 지금은 훨씬 개운하다. 설거지하다가 서방구 기침 소리가 들려 엄마가 쟁여다 놓은 쌍화탕을 데워주었다. 방문 앞에 두고 멀찍이 서서 가져가는 걸 지켜보는 게 좀 웃겼다. 우리 모두 무사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생겨도 잘 받아들여보자.
다시 자러 가야겠다. 우주와 나에게 일정한 스케줄이 생기다니. 왠지 모르게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