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월 0일
고단하다. 우주보다 먼저 기절했다가 화들짝 놀라 깼다. 설거지 거리가 나를 기다린다. 오늘 한 번도 정리하지 못해서 산더미라 그냥 잘 수가 없다. 마구잡이로 쌓인 그릇을 다시 애벌 하며 정리해서 식세기에 착착 넣었다. 다 넣기엔 양이 많아서 커다란 것들은 손으로 처리했다. 씻으러 들어갔다가 캠으로 뒤척이는 우주가 보여서 머리 감기는 포기하고 얼른 몸만 씻었다. 그래도 개운했다. 며칠 쌓인 빨래를 개며 텐트 밖은 유럽 2탄을 봤다. 지난 편이 너무 좋았는데 금방 새로 나와서 기뻤다. 그냥 자고 싶은데 오늘 낮에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1년 전 오늘 일기를 읽는 바람에 기록의 힘을 다시 느끼고 일기를 꼭 쓰기로 다짐해 버려서 뭐라도 남겨야 한다. 눈이 자꾸 감긴다.
서방구 격리 5일 차, 우리는 무사하다. 우주는 나흘 째 어린이집 적응 중이다. 조금 더 늦게 데리러 오래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10시 55분에 원에서 전화가 왔다. 우주 호출이었다. 아침부터 내내 졸려하더니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았나 보다. 촉감놀이 매트에 올라가 보자고 했는데 그것도 무서워서 싫다고 했단다. 머리를 자르고 카페에 잠시 앉았다가 얼른 어린이집으로 달려갔다. 우주랑 약속했던 문구점에 들렀다. 숫자 스티커를 보고 이것도 사겠다 저것도 사겠다며 신이 났다. 2층도 궁금해서 혼자 막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뭐가 없어서 사겠다는 둥 웃긴 말을 쏟아내고 스티커 두 팩과 두더지 게임(지금은 산 줄도 잊은 모양이다.)을 고르고 나는 라벨지를 샀다.
집에 오자마자 우유 한 잔 때리더니 잘 기세여서 얼른 재워버렸다. 나이스 타이밍이다. 블라인드 설치하러 기사님이 오시기 전에 낮잠이 끝났다. 이사 오기 전에 주문해 둔 블라인드를 드디어 달았다. 방이 좀 더 있어 보인다. 이제 옷을 다 갖춰 입지 않고도 불을 켤 수 있게 되었다. 우주가 자는 동안 만들어 둔 소야볶음과 콩나물 국을 먹었다. 세 식구가 먹으니 평소에는 먹고도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두던 양이 한 번에 사라지기도 한다. 친한 언니가 직접 만들어서 싸다 준 반찬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무릎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이틀은 풀로 요리를 쉬었다. 나는 줄 수 없는 종류의 도움이다. 반찬을 먹는 내내 보내준 마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우주 낮잠이 당겨져서 오후 시간을 많이 쓸 수 있게 됐다. 어제 휴관일이라 허탕 쳤던 도서관에 다시 갔다. 우주는 나가기도 전에 신났다. 1, 2, 3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우주랑 나는 서로 다른 것을 보았지만 아무튼 둘 다 행복했다. 2층 열람실은 캐나다에 있을 때 자주 갔던 대학교 도서관을 떠오르게 했다. 우주가 어린이집에 더 오래 있게 되면 혼자서 꼭 와 봐야지. 우주는 다시 밖으로 나가서 공원 바닥을 쓸고 다녔다. 광장의 경사진 데크가 약간 미끄러웠는데 그게 미끄럼틀이라며 한참 동안 바닥에서 뒹굴었다. 작은 놀이터에서도 열심히 뛰고, 모래 놀이장에서도 모래 범벅이 되어 신나게 놀았다.
집에 가기 아쉬워서 계속 더 놀겠다는 우주를 와플과 주스로 꼬셨다. 도서관 1층의 카페에서 와플을 샀는데, 진짜 너무 맛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먹으며 맛있다고 연신 감탄했다. 집에 오자마자 우주는 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목욕했다. 우주를 욕조에 담가둔 사이 얼른 육수를 내고 미역을 불렸다. 내가 곁을 지키고 있지 않으니까 놀 사람이 없어서 지루했는지 자꾸 탈출하려 해서 그냥 얼른 씻겨버렸다. 요리하는 꼴도 그냥 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신나게 놀고 왔는데도 왜 이렇게 껌딱지처럼 붙어있는지 모르겠다. 뭔가 맘에 안 드니 자꾸 일을 벌이고 혼나고 또 벌이고 혼나고. 전쟁 같은 저녁이었다.
공원에서 굴러다닌 보람이 있었다. 10시가 되기도 전에 잠들었다. 자기 아쉬워서 몸부림을 치다 또 혼이 나고 그제야 누워서 진정하더니 금세 잠들었다. 귀여운 자식. 내일은 소리를 덜 지를 수 있길. 격리가 이틀 남았다. 좀만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