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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May 07. 2023

네 살과 떠나는 당일치기

서울동물원

세 살 딸을 둔 친척언니와 동물원 약속을 잡았다. 완벽한 일정을 위해 일주일 전부터 날씨를 매일 확인했는데 하필 약속한 날짜에 춥고 비가 온다고 했다. 일단 전날부터 우리 집에 모여 합숙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예보는 딱 들어맞았고 우리는 하루 더 합숙하고 나서야 동물원 가기 좋은 날을 맞이했다. 하늘은 푸르고 기온은 적당하고 미세먼지도 없던 날이었다.




이른 아침을 맞이한 두 아기는 동물원 가는 길에 짧은 낮잠에 들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도착해서도 깨지 않고 조금 더 잤다. 그 사이에 나는 날씨에 흠뻑 젖었다. 집에서 싸들고 온 아아메를 들이키며 잠깐의 여유를 누렸다. 오늘 안 왔으면 어쩔 뻔했냐며 언니와 연신 감탄했다.


대공원 입구에서 동물원 입구까지 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걸어가거나 코끼리 열차를 타거나 리프트를 타는 것. 오기 전에 언니가 이런저런 포스팅을 보여주면서 어떤 게 좋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신나서 리프트를 타고 싶다고 했다. 에버랜드 리프트를 상상했다. 낮고 짧은. 입구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설렜다. 네 살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넷이 줄을 서자 안전 요원은 언니에게 아기를 안게 하고 그다음에 나를 세우고 마지막 세 번째 자리에 우리 집 네 살을 세웠다. 리프트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통에 다급하게 내려진 지시에 엉겁결에 응했고, 우리는 그렇게 탑승했는데 아뿔싸... 리프트가 높아도 너무 높았다. 길어도 너무 길었다. 언니가 대공원이 정말 크다고 말했는데, 크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안 될 만큼 거대했다.


동물원 입구에서 동물원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리프트로 한 번 더 갈아타려고 2회권을 끊은 나 자신을 원망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운행시간이 총 25분이나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 살이 움직이지 않기만을 바라며 한 손으로 아이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은 땀이 나도록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 두 번째는 얼른 네 살을 품에 안고 리프트에 올랐다. 아찔한 높이에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지려 했다. 지금 생각해도 땀이 난다. 다시는 그 리프트에 몸을 맡기지 않으리...



긴장을 잊어보려 찍은 셀카. 엉망이다.




다행히 정말로 다행히 모두 무사히 동물원 꼭대기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리프트가 오래 걸려서 조금 걸으니 애들이 배고프다고 했다. 아주 오래된 듯한 푸드코트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미리 싸 온 밥을 주고 우리는 짜장밥과 돈가스를 마셨다. 늘 그렇듯 정신없는 식사는 시작도 끝도 애들이 정한다. 자기들 배 다 차고서 일어나려고 꿈틀대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한다.


볕이 엄청 뜨거웠다. 기온이 20도였는데 여름 같이 느껴질 만큼 더웠다. 그래서 그런지 동물들도 그늘 속에 들어가 있어서 아마도 아이들은 동물을 찾아내지 못한 것 같다. 우리 네 살이 유독 흥미를 가지고 봤던 동물은 코끼리와 기린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체의 한 부분이 기이하게 긴 동물들이다. 그래서 신기한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한참 그 앞에 서서 떠나지 않았다. 코끼리 가족이 실내로 들어가 버린 뒤에야 돌아섰다.





봄날의 동물원은 소풍 나온 어린이들로 가득했다. 간혹 중학생들도 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즐거워 보였다. 아이들 틈에 서있는 선생님도 보였다. 존경스러웠다. 내 아이 하나 데리고 다니는 것도 힘든데 비슷한 또래를 줄줄이 통제하는 선생님은 실제와 상관없이 매우 큰 사람 같았다.


유모차에서 탈주하는 3세, 3세의 유모차를 타겠다는 4세와 함께 걷고 또 걸었다. 연한 잎을 낸 커다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산책만 해도 좋은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처럼 아이들도 즐기면 좋으련만. 까까와 주스로 달래 가며 다니다가 사자우리 뷰를 가진 카페에 들어가게 됐다.


내부의 벽마다 벌건 글씨로 아이를 잘 보살피라, 외부 음식은 절대 안 된다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아직 무슨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잔소리부터 듣는 기분이라 불쾌했다. 그러다 가만 생각하니 얼마나 당했으면 저럴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모두가 중간만 한다면 참 좋을 텐데.


아무튼 카페는 사자 우리 속에 들어간 듯 사자와 가까웠다. 너른 우리에서 누워 자기도 하고 어슬렁어슬렁(정말 사자의 걸음과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걸어 다니기도 하고 갑자기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그야말로 야생이었다. 우리는 잠시 앉아 시원한 커피를 또 드링킹 하고 아이들이 못 참고 꿈틀대려 할 때 일어났다. 천천히 출구로 걸어가면 애들 낮잠 시간에 집으로 출발할 수 있겠다며 가는 길의 동물들은 스치듯 보고 지나갔다.


돌아가는 길에 지도를 보니 우리는 동물원의 반도 둘러보지 못했다. 세 시간이 넘게 있었는데. 다음에는 반대쪽을 돌아봐야겠다며 출구로 나와 코끼리 열차 타는 줄에 섰다. 세 살과 네 살은 코끼리 열차가 나타나자 엄청 신났다. 막상 타고 보니 긴장되었는지 실망한 건지 웃음기는 사라졌지만. 코끼리 버스 열차냐고 묻는 걸 보니 진짜 기차가 아니라서 조금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코끼리 열차는 리프트에 비하면 빛의 속도로 빨리 끝났다. 우리는 아침에 출발했던 그 자리에 다시 도착했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푹 잤다. 우리 집 네 살은 집에 와서도 한참이나 더 깊은 잠을 몰아서 잤다. 깨워야 했는데 나도 지치고 쉬고 싶어서 그냥 더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덕분에 그날 밤이 매우 길었지만.


왠지 지쳐 보이던 동물들이 생각나서 동물원이라는 곳이 계속 있어도 괜찮은지, 며칠이 지난 뒤에 검색해 보았다. 동물원은 관람만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의사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 인터뷰를 보니 동물 보호도 동물원이 가지는 하나의 큰 역할이라고 했다. 그렇기는 해도 갇힌 동물들을 보고 온 찝찝함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네 살이 크는 동안 언젠가 또 가보게 될 텐데 나중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면 관람에 그치지 않는 경험을 함께 해야겠다.




언니가 남겨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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