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함은 규칙에서 온다.

지극히 개인적인 살림 이야기 2

by 마이문

규칙, 규율, 순서, 우선순위 등의 어떤 일정한 틀을 가지는 단어를 싫어했다. 성격검사로 나를 발견하기를 좋아해서 다양한 유형의 검사를 체험했었는데, 늘 '자유'와 '질서' 항목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났다. 언젠가부터는 그런 나 자신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규칙 같은 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고 나는 자유를 수호하는 자인 양 내 무의식은 착각했던 것 같다. 그런 성향과 바탕은 인생의 여러 가지 커다란 선택에 영향을 주었고, 일상의 자잘한 선택에도 스며들었다.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살림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홈키파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집안일의 각 영역을 천천히 뜯어보기 전까지 살림이란 그저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일이 생기면 그때그때 처리해도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딱히 생각이랄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해왔다. 어떤 정신도 룰도 필요 없는. 그러니 살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었고, 집은 치워도 치워도 어지러운 곳이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날은 집이 아비규환이더라도 좋아하는 노래를 노동요 삼아 착착 정리하고 청소하는 희열을 느끼곤 했지만 사람이 어디 에너지가 넘치는 날이 살면서 며칠이나 되겠는가. 거의 대부분 무언가에 파묻힌 기분으로 살았다.


집안일에 룰을 정하고 문서를 만들어 테스트를 거치던 중,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방에서 나오니 어젯밤 미처 끝내지 못한 설거지 거리가 쌓여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스트레스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설거지는 그날을 넘기지 않기로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나름 프로젝트라고 이름까지 붙여가며 집안일 좀 잘해보겠다고 만든 룰인데 내가 스스로 어기다니. 자괴감에 슬쩍 발을 담그려다 문득 관대함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렴 어때.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 순간, 이제껏 살면서 무시해온 규칙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의 은총을 받고 있음을 마음 깊이 깨달았다. 이런 날도 있다며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규칙 덕분이구나. 규칙이 없을 때는 매번 짜증과 함께 설거지를 했었는데. 단 두 번이든 다섯 번이든 규칙대로 하고 난 다음에 어긴 한 번쯤이야 눈감아줄 수 있는 부분이 되었다. 혼자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던 그날 저녁, 신랑에게 이 이야기를 나누니 신랑은 '그렇지. 규칙이 없는 건 무질서지.' 라고 말했다. 맞다. 나는 자유라는 아름다운 단어에 숨어 무질서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참 부끄럽게도 두세 달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집안일에 룰을 만들면서 '내가 이 규칙들에 갇히면 어쩌지?' 하는 웃긴 생각을 했다. 문서를 만드는 작업은 재미있지만 문서를 걸어두는 순간 그것대로 따라야 하고 잘했는지 못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사는 삶은 과연 기쁠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했다.


자유가 나의 최고 가치라고 외치며 살아온 데는 꽉 막히지 않고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가장 컸다. 될 수 있으면 이해하고 용납하고 무던하게 넘어갈 줄 아는 사람. 반대로 원칙과 규칙에 관심을 가지면 답답하다는 착각을 해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무질서한 세계에서 유연함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원했던 유연함이란 규칙이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미덕이다.


쌓인 설거지를 보고 유레카를 외친 날, 나는 규칙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규칙 사이를 유연하게 오갈 수 있는 홈키파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