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활다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cyLu Jun 21. 2017

화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뭘 하겠다고 이 많은 것들을 나는 얼굴에 바르고 있는 걸까.

화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2년 전 어느 날 아침, 샤워를 하고 나와 거울 앞에 서 스킨, 로션, 에센스, 선크림, BB크림, 파우더, 아이라인, 눈썹, 하이라이터, 입술 순으로 이어지던 나의 조잡한 화장술이 몹시 지치게 느껴졌다. 뭘 하겠다고 이 많은 것들을 이른 아침부터 나는 얼굴에 바르고 있는 것일까.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하게 이어진 동일한 패턴으로 얼굴 위 그림을 그리던 나의 손동작이 나 자신을 몹시 지치게 만들었다. 서른 살을 앞둔 몇 달 전 일어났던 첫 번째 사인이었다. 




몇 달 후 다시 찾아온 두 번째 싸인. 답답함. 바르고 또 바르고 칠하고 또 칠하고 피부 위로 겹겹이 올리던 화장의 순서를 마무리하던 순간 내 피부가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거기, 숨은 쉬고 있니..?’라고 묻는다면 이미 졸도 직전의 내 피부는 대답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날 아침, 나는 화장실로 돌아가 다시 세수를 했다. 로션과 선크림만 바르고 나온 그날 아침,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사무실로 들어서기 직전, 모두들 ‘무슨 일 있니?’, ‘아프니?’라고 물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아니, 얼마나 화장을 열심히 하고 다녔는데 그 차이를 못 느꼈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좀 슬프기까지 한 일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물론 최소한의 예의로 눈썹 끝부분을 조금 더 연장해주고, 입술에는 약간의 붉은 끼를 묻히지만 기초 화장품을 제외한 화장대 위에 있던 대부분의 화장품들은 모두 하나씩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최근에는 이마저도 줄였다. 그래도 남은 것은 피부뿐이니 스킨에 에센스, 로션에 수분 마스크까지. 기초 화장품만은 놓치지 못하겠던 나였는데 최근 화장품 속에 환경호르몬을 누적시키는 화학성분이 그리도 많다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화학성분이 없는 수분크림 하나 남겨두고 모두 휴지통으로 떠내려가 보냈다. 덕분에 나에게는 이제 5분이라는 늦잠의 축복이 추가되었다. 


화장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은 늦은 저녁 집으로 퇴근해 브래지어의 끝부분을 풀어버리는 것만큼의 해방감이었다. 화장으로부터의 해방은 내게 20분 정도의 늦잠을 허락해주었고, 매달 이래저래 들던 화장품 값으로부터도 해방시켜주었다. 구남자 친구, 현 남편에게 민낯을 보여주는 부끄러움으로부터도 해방시켜주었고, 덥다 싶으면 언제든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물론 그 자유는 자주 행해보진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그 해방감은 여행지에서 더욱 크다. 


아무리 가장 중요한 도구와 화장품만 챙긴다 하여도 화장하는 여자에겐 모든 도구와 화장품이 중요하다. 우선순위를 세우고 리스트를 짜 보려 해봤자 모든 도구와 모든 화장품이 소중하다. 결국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 화장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았을 당시에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아이라이너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주의였다. 하지만 아이라이너라는 것이 바탕이 돼주는 아이쉐도우와 아이라이너 위로 살살 올려 아이라이너를 확실히 고정해주는 아이브로우 없이는 허당인 것. 결국 하나가 필요하면 모두가 소환되어야 하는 것이 화장술인 것을. 백패커 여행자였던 호주에서는 나를 위한 화장대도, 모공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확대 거울도, 아이라이너가 번지지 않게 그릴 수 있도록 노련히 밝혀줄 조명도 없었지만 나름의 잔꾀들을 열심히 부려 화장술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덕분에 화장품이 가득 담긴 파우치는 언제나 나의 캐리어 한구석을 차지하였고, 아침은 부지런해야 했으며, 머리는 말리지 못해도 화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이제 투명 지퍼백에 수분크림과 선크림, 눈썹 그리는 아이브로우와 립스틱 하나만을 들고 여행을 떠났다. 결혼 전 2년 동안 나의 민얼굴에 익숙해진 당신이기에 더욱 두려움도 없다. 강렬하다는 북유럽의 햇살에 대한 작은 방어로 선크림을 바르긴 하겠지만 이런들 저런들 나는 탈 것이다. 타도 괜찮다. 어차피 까맣게 타들어간 피부 때문에 톤을 바꿔야 할 파우더도 없다. 있으면 있는 그대로, 없으면 없는 그대로. 내편은 그런 나를 그대로 사랑해줄 것이기에, 나 역시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기에. 


나는 화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화장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