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과학자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설명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을 읽다 사고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를 발견했다. 저자인 카밀라 팡은 사고를 미래를 계획하는 모멘텀 사고와 현재 순간과 느낌에 집중하는 포지션 사고로 구분했다. 모멘텀 사고란 한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 옮겨 가도록 하는 사고인 반면 포지션 사고란 현재를 사는 것이다. 양자역학에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다. 이처럼 상보성을 가진 2가지 종류의 사고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멘텀 사고는 유익하다. 성취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피곤하고 괴롭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대부분의 경우 고민을 함께 가져다준다.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멘텀 사고는 말 그대로 나를 계속 움직이게 만든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나는 결국 과부하 때문에 고장 날 것이다.
포지션 사고는 현재에 집중한다. 잠시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잊게 해 준다. 개인적 경험을 되짚어 보니 집에서 늘어져 넷플릭스를 보는 것, 깊은 잠에 빠지는 것,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것 모두 포지션 사고의 순간들이었다. 모멘텀 사고의 순간들은 항상 많은 고려사항이 함께 하지만 포지션 사고를 하는 순간은 훨씬 단순하다. 복잡하지 않은 단 하나의 명확한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 포지션 사고의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할 때 현재에 집중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카밀라 팡도 포지션 사고의 순간으로 요가를 꼽았다. 우리는 왜 운동을 할 때 쉽게 포지션 사고에 빠져들 수 있을까? 운동에서 주어지는 목표는 현실에서 겪는 목표들에 비해 단순하기 때문이다. 날아오는 공을 똑바로 쳐다볼 것. 몸의 밸런스에 집중할 것. 앞을 보며 길을 따라 달릴 것. 복잡한 문제를 직면하면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필연적으로 모멘텀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하고 명확한 목표는 그 자체가 계획이기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는 포지션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내가 생각하는 쉼은 ‘사고의 휴식’이다. 고강도 운동을 하면 몸이 지치는 것처럼 높은 강도의 사고를 계속하면 사람은 쉽게 지친다. 나는 늘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이 많기 때문에 완전히 사고를 멈춰서 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강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사고의 휴식을 취할 수는 있다. 즉, 포지션 사고에 빠지는 순간 나는 진정으로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포지션 사고의 순간이 ‘어떤 활동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자신의 상태에 따라 포지션 사고를 할 수도, 모멘텀 사고를 할 수도 있다. 나는 요즘 매주 1편 이상 글을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주중 내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순간 글쓰기는 나에게 모멘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활동이다. 그러나 갑자기 새벽에 아이디어가 떠올라 글을 쓰는 지금은 온전한 포지션 사고의 순간이다. 좀 더 수월하게 포지션 사고에 빠져들게 하는 활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절대적이진 않다
중요한 건 미래를 사는 나와 현재를 사는 나의 밸런스이다. 휴식은 단기적으로 보면 현시점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려다준다. 성공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습관 중 하나가 바로 규칙적인 운동이다. 모멘텀 사고에 능한 사람도 포지션 사고의 필요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실천한다. 가끔은 미래를 잠시 잊고 포지션 사고에 빠져 들어 휴식을 취하자. 포지션 사고를 통해 얻은 휴식의 에너지가 다시금 나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영감을 받은 구절>
모멘텀 사고는 시간에 따라 살면서 한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옮겨 가도록 하며, 이 사고에 따르면 행복은 우리가 성취하고 계획한 것으로 정의된다(즉, 책임이라는 어른의 세계다.). 반면, 포지션 사고는 현재를 살면서 현재 순간과 현재가 주는 느낌에 사로잡혀 다른 모든 것을 차단하고 그저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죄책감까지 따른다. 포지션 사고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데, 그것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되려면 해야 한다고 들어왔던 것과 완전히 어긋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