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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노래 Oct 21. 2020

감귤 할머니

어쩌면 인생의 색깔은 주황색이 아닐까.

제주까지 와서 고작 중문 스타벅스에 홀로 앉아 책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얼하고 있나. 차가운 공장의 대량 제조과정을 거쳐 인위적으로 뽑아진 채 망연히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진 한라봉 쥬스는 서울에서 먹던 표준화된 오렌지 쥬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득 스타벅스에 걸어들어오며 스치듯 지나친 한 노인이 생각났다.  횡단보도와 스타벅스 사이의 벤치 옆에 꾸그리고 앉아 좌판을 깔아놓은 행상 할머니. 할머니는 분명 귤을 팔고 있었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지. 귤을 사먹자.  책을 접어 넣고, 탁자에 놓인 쥬스를 한입에 들이킨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망에 20개가 묶인 귤은 고작 3,000원. 방금 스타벅스에서 마신 한잔의 쥬스가 5500원이었다. 귤을 한망 달라고 한 뒤 슬쩍 옆에 벤치에 앉아도 되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그러라면서 자리를 비켜주시려 했다. '비켜주실 필요까진 없어요. 그냥 옆에 앉아서 먹으면 됩니다.' 그래도 할머닌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내가 실수를 했구나. 제주라고는 하지만, 12월이다. 오후 2시 햇볕이 제법 따스했어도 바닥은 얼음장과 같을 터였다. 계속 올라 앉으시라해도 한사코 마다했다. 할머니는 보도블럭과 화단 사이 약간 솟아 오른 석대위에 헝겊 쪼가리를 깔고 앉았다.

푸른기가 반쯤 감긴 제주도 감귤은 싱싱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귤이 더 맛있게 보이게 하기위해 일부러 귤을 따뜻한데 두고 색소를 뿌려 노랗게 만들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방송에 의하면 진짜 싱싱하고 맛있는 귤. 즉, 아무런 인위적인 조치를 하지 않은 진짜 싱싱한 귤은 샛노란 귤이 아닌 약간의 푸른기를 머금고 있는 귤이었다. 귤을 뒤집어 뒷꼭지에 엄지손가락을 부여넣고 귤껍질을 확 벗기자 햇살아래 싱그러운 즙을 흩뿌리며 주황빛 속살을 드러냈다. 입을 크게벌려 귤하나를 통째로 우겨넣고 씹었다. 온입에서 귤과즙이 터지며 아우성이다. 입에 가득찬 귤과즙은 입안의 공간을 모두 채우고도 남아 입밖으로 조금 흘러나왔다.  방금 오렌지 쥬스를 벌컥 들이키고 나왔는데도 이런 맛이라니. 배가부를수록, 익숙한 맛일 수록 역치를 자극하지 못해 한계효용이 감소하는 일반적인 이론은, 제주도 감귤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할머니, 귤이 엄청 맛있어요. '

'그거 어디서 물건 떼온게 아니고, 우리집 귤나무에서 직접 따온거야.'

'아 정말요? 오늘 많이 파셨어요? '

'9시에 나와서 지금까지 총각이 첫손님이야. '

놀랐다. 9시에 나와서 지금이 오후 2시, 무려 5시간동안 이 바닥에 앉아 귤을 팔고 있는 이 노인의 시급은 고작 600원이었다. 그마저도 내가 이 귤을 먹고 있기에 가능한 시급이다.
 
'그래도 주말에는 중문이 그나마 사람이 많아서 일부러 이리로 나오는데, 요즘은 촛불집회다 뭐다 사람이 통 없어.'

'할머니는 집회하는게 싫으시겠어요.'

'그럼, 그런거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어차피 해먹는놈들은 다 해먹는데.'

'식사는 하셨어요?'

할머니는 머뭇거렸다. 잘 못들었나 싶어 한번 더 물었다.

'할머니, 점심은 드셨어요?

'고구마 튀김 먹어.'

'네?'

'밥은 안먹고 고구마 튀김을 싸가지고 다녀. 우리집 마당에서 기른 고구마'

보자기를 주섬주섬 풀어 하나 먹어보라고 건네는 고구마는 노란 튀김옷이 덧입혀져 있었다.

'아니, 이런걸로 식사가 되세요?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하셔야 되는거 아니에요?'

'밥먹는게 영 귀찮아. 배가 고프지도 않고.'

노인은 슬그머니 내 눈빛을 피하듯 이야기 했다. 아침은 집에서 간단히 먹고, 점심과 저녁은 이걸로 해결한다는데, 배가 안고픈 사람이 어디있겠나. 아파 병석에 누워 기력이 파한 사람이 아니고서, 새벽 일찍 눈을 뜨고, 마당에 고구마와 귤나무를 기르는 번잡스럽고 손 많이 가는 일을 하는 노인이 배가 안 고플리가. 노인은 아침 9시에 이곳에 나와 오후 6시까지 앉아있다가 돌아간다. 숨만 쉬어도 배가 꺼지는 법인데, 노동을 하며 열량을 소비하는 사람에게 끼니는 이상하리만치 자주 찾아온다. 주름 가득한 손으로 건네준 고구마 튀김은 내입에도 무척 맛이 있었지만, 그걸 밥 대신 매일 씹어넘길 일이라면 고통스러울 일.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출근할 때는 기름을 덜 먹는다는 이유로 스쿠터를 타고 일을 나오고, 하루종일 고구마로 끼니를 떼워가며 차가운 바닥에 앉아 귤을 팔고는 몇천원 현금을 쥐고 돌아가는 노인의 삶. 박근혜의 퇴진을 외치는 시위대 때문에 요즘 하루가 더 궁핍하다는 노인은,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본인의 궁핍한 삶의 근본이 그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것과, 시위대가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

'내가 원래는 물에서 먹고살았어.'

'해녀였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지, 근데 이제 몸에 병이 생겨서 물질을 못해. 몸이 저리고, 가려워'

해녀의 직업병이 폐와 관련된 것인줄로만 알았지, 그런 증상이 있는줄은 몰랐다.

'물질을 하셨으면 돈 많이 버셨겠어요'

'그거 다 아주 옛날말이야,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았어. 한 겨울에도 물에 들어가야 되는데 얼마나 살이 아프다고.

그래도 노느니 뭐해, 소일거리로 여기 나와 앉아있는거지'

노인은 춥다고 하지 않았다. 살이 아프다고 했다. 극심한 추위는 통각으로 전해지는 명백한 통증이다. 겨울 물질에 비하면 지금 낮에 이렇게 햇볕에 앉아 사람구경하는건 일이 아니라 소일거리라고.

지금까지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노인은 가족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5남매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오산에서 살다가 이번에 제주로 내려와서 가까이 산다는 것과, 두 손자가 공부를 잘했는데 한 손자는 이번에 회계사 시험을 붙었다는 것이고, 또 한 손자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수고스러웠던 노인의 삶에 끝자락에 남은 자랑은 손자의 공부였다. 손주의 학력과 자격증이 얼마 남지 않았을 할머니의 실질적 삶을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배우면 가난을 면하게 될 것이라는 노인의  확신에 가까운 믿음은 이제 절대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노인의 마은은 공허해졌을 것이다.  한시간이 넘도록 노인은 이야기하고, 나는 듣고 질문하기를 반복하면서 노인은 슬그머니 돌아앉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뜻이다. 5시반에 서울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려면  3시반에는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다.  할머니에게 사진을 한장 찍자고 했으나 역시 이에 응할리 없었다. 할머니는 지금 취미로, 소일거리로 이곳에 나와 앉아있는게 아니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비용이 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쨌든 돈이 필요했다. 정말 모든 노동이 다 신성하다고 할 수 있을까. 83세의 삶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자비없는 고단함은 외지인의 카메라 앞에 작아진다. 지금 길가에 앉아 귤을 팔고 있는 늙고 주름진 내 얼굴이 사진에 찍히는 것은 치욕일 것이다. 나는 카메라를 거두고 노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귤 한봉지를 더 사들었다.  노인은 그저 고마워했다.

서울에 올라오니 해가 저물어 어둡다. 손에 들린 감귤망을 바라보았다. 

제주와 다른 서울의 차가운 공기를 맞으면서, 더 차가운 바닥에 앉아 행인을 바라보고 있을 노인과, 입안에 가득 차올랐던 감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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