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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Dec 31. 2020

[책과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作

우리는 닮은 듯 다른 부녀지간이다. 서로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항상 팽팽한 긴장감과 거리가 존재한다. 그러다 문득 서로를 바라보면 소스라치게 닮았다. 자식이 부모님을 닮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와 료타의 아버지처럼 하필 닮고 싶지 않은 부분이 닮았다. 참 다행스럽게도 아빠는 료타의 아버지처럼 도박에 빠져 집안 재산을 모두 탕진하는 난봉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의 가장 싫은 면을 똑같이 지닌 사람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꽤나 불편하고, 잔인한 일이다. 우린 닮은 만큼 각자의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셈이고,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을 큰 노력 없이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공간에 같이 있다 보면 백이면 백 다퉜다. 상황은 내가 아빠로부터 온갖 가시 돋친 말을 듣고, 너덜너덜해져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아빠 같은 어른은 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태풍이 지나가고’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그 누구보다 료타에게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상을 받고 촉망받던 작가였던 그가 어느새 아버지의 인생을 똑같이 재현하고 있음을 직면했을 때의 그 착잡하고 비참한 기분은 어땠을까.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는 말끝에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엄마가 아빠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빠 안에 깊이 뿌리 박힌 고독을 끌어안고 사는 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엄마가 사랑을 주어도, 곁에 가족들이 늘어나도 아빠는 끊임없이 고독하다 했고, 언제든 훌쩍 떠나 산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고 한다. 어렴풋이 짐작해 보건대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일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상처가 두려워 차라리 홀로 있는 쪽을 택하고 싶으셨을 테다. 엄마는 아빠를 보며 누군가 옆에 있든, 없든 죽을 때까지도 고독을 끌어안은 채 외롭게 세상을 저버릴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인색하고 서투른 아빠의 손을 쉬이 놓을 수 없었나 보다.

엄마는 나의 우울한 유전자 역시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철부지에 말괄량이였던 나는 이상하리만치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삶은 곧 고통이고, 이번 생이 마지막이면 좋겠다고. 내가 처음 이 말을 내뱉었을 때 엄마는 꽤 놀랐다고 한다. 딱히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거니와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할머니 손에 컸기 때문이다. 젊고 가난한 부부였던 덕에 늘 일에 치여 바빴으니 부모님과 미주알고주알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도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 할머니는 생에의 집착도 상당하시고, 삶에 대한 만족도나 행복감이 높으신 분이었기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웠을까 의아하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내가 자주 그런 말을 했고, 그때마다 자못 심각한 얼굴이어서 엄마는 꽤 오래 속앓이를 했다고 고백하셨다. 혹여나 내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머리를 밀고 절에 들어갈까 봐. 아빠만으로도 버거운데 나까지 이런 말을 해댔으니 엄마는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서로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음에도 아빠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아빠가 했던 말을 나도 하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참 묘하다. 확실히 정신줄을 놓고 있으면 나 역시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사람이든, 돈이든 무언가를 움켜쥐려 애쓰지만 결국에는 다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어차피 사람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고독한 존재이고, 삶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인데.’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지금 이곳을 훌쩍 떠나 깊은 산 속이나 무인도의 오두막에서 홀로 사는 내가 서있다. 이래서 나의 가까운 지인들은 내가 언제든 사라질 것 같다, 바람 같다고 말하나 보다. 언제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엄마가 일평생 가까이에서 아빠를 바라보며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 본다. 서글픈 일이다.

영화의 말미, 료타의 어머니 요시코는 이런 말을 한다.


“떠나고 난 뒤에 그리워해 봤자 소용없어. 눈앞에 있을 때 잘해야지. 왜 남자들은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건지. 도대체 언제까지 잃어버린 것을 쫓아가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그렇게 살면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은데.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란다.”


나는 어릴 때 꿈꾸던 어른도 되지 못했고, 어느새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사람과 똑 닮은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나의 환경과 천성만을 탓하기에는 분명 내가 바꿔나갈 수 있는 기회 또한 제법 많았을 것이다. 내가 제 때 알아차리고 잡지 못했을 뿐. 나의 근원적인 고독감과 우울함은 아빠에게 물려받은 처절한 감성이지만, 이제라도 아빠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리라 다짐한다. 더 이상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깨진 항아리로 살고 싶진 않다. 상실과 이별의 고통이 두려워 혼자가 되려는 어리석은 선택 또한 하지 않을 테다.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돌고 싶단 꿈은 소중히 간직한 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두 다리를 깊게 박고 뿌리내리며 살고 싶다. 아빠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아빠의 삶은 엄마 덕분에 방향이 많이 바뀌었고, 일상의 행복들로 채워진 것 같으니까.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조금씩 변화해 가리라 믿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감사하면서 끊임없이 꿈꾸고 도전하는 그런 어른에 가까워지고 싶다.


나와 아빠에게도, 이제 막 태풍이 지나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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