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Draw"
'이 번에는 풍경화(도시 전경)를 그려보았습니다. 이 그림이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고 있는 멋진 여러분께, 잠시나마 여행 같은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루라도 빨리, 모두의 마음과 일상에 꽃과 같은 미소가 피어오르길 기원합니다.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하세요. :)'
'여러 곳에서 애쓰고 계시는 의료진들과 봉사자분들에게 지극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분들과,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활을 양보하고 있는 멋진 분들, 바로 여러분에게 응원의 박수를 전합니다.'
1. 이 그림을 한 달 만에 완성을 하고서, 몇몇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에 그림과 함께 남긴 글들이다. 이 그림 속 풍경을 그리려고 마음먹었던 2월 중순부터 이 그림이 완성된 3월 말 사이에는 세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던 3월 초에는 한국의 상황이 힘들어지는 시기였는데, 그림이 완성된 3월 말에는 더 많은 나라들의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려고 처음 결정했을 때에 이 그림 속의 풍경은 단지 그려야 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오래전 옛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 본, 붉은 지붕이 있는 건물들을 그려보고 싶다는 오랜 생각과 코로나19 감염증의 확산으로 인해서 답답해하고 있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만한 탁 트인 풍경화를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고른 여러 선택지 중 하나였으니까.
그림을 그리다가 보니 이곳이 어딘지가 궁금해졌고 검색을 통해서 이곳이 이탈리아의 피렌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이 그림이 '피렌체(FIRENZE)'라는 가제목을 가지게 이유였다. 어린 시절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라는 인물에 매료된 적이 있었고, 어른이 되어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의 '군주론' 등과 같은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조금 더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던 도시. 그 도시를 우연하게도 그리고 있다는 생각에 신기해하는 정도가 이 대상을 바라보는 당시의 감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풍경화가 살면서 그려본 겨우 세 번째 풍경화였기 때문에, 초반에는 하얀 백지를 앞에 놓고 어떻게 그려갈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데만도 몹시 마음이 바빴다. 게다가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표현 방법을 이 번 연습을 통해서 찾아보려는 나름의 목적까지도 더해서 도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이 아니라 정신 역시 그저 그림을 그려가는 것에 온통 빠져 있었다.
2. 그림을 그려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초반의 구상에서 스케치로 그리고 마침내 채색으로 넘어가서 색이 채워져 갈수록, 단순 반복 작업이 된다. 이것저것 구상하는 재미가 있던 초반이 지나고 나름대로 이야기의 기초를 만들어가는 초중반까지의 즐거움은,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물감(필자의 경우에는 디지털 색채) 칠에 묻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필요한 색을 필요한 곳에 바르는 일에는, 필요한 곳에 필요한 색을 바르는 동작 이외에 다른 행위는 필요 없으니까. 마치 인형을 디자인하고 봉제를 계획하는 재미는 사라지고, 수많은 인형의 눈알을 반복적으로 붙이는 상황과 같다.
그런 데다가 무슨 배짱으로 이런 풍경을 선택했는지, 풍경 속에 수많은 지붕과 깨알 같은 창문들이 작업 내내 '단순 반복의 지옥'같은 표정으로, 후회하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회했다. 그만하자고 스스로를 꼬드기기도 했다. 아니 현실을 짚으며 설득을 했다. 30시간 정도 걸려서 이 그림 하나를 그리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지 포드주의적 이론을 설파하기도 했으니까. (실제로 이 그림의 작업시간은 대략 27시간이다.)
3. 현실은 언제나 압도적이어서 그것을 이기고자 하는 마음은 대체로 바위에 던져진 계란처럼 무기력 해지기 십상이다. 그렇게 복잡스레 혼란을 조장하던 마음의 소리가 잦아든 것은, 이탈리아가 상당히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부터이다.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할 만큼 불가항력적인 절망 바라보는 일과, 죽은 사람들을 단순히 관리해야 할 숫자와 비율로 치환해 버리며 계산기를 두들기는, 전 세계의 수많은 리더와 언론들의 근대주의적 악취를 2020년에 맡는 일에 비하면, 깨알 같은 인형의 눈알을 서른 시간 정도 붙이는 고욕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단순 반복의 지루함은 그렇게 단숨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떤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의지처럼 자리하기 시작했다. 빼곡한 작은 건물과 그것보다 더 작은 창문에 담기던 부정적인 감정을 대신해서 이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을 바라는 기도가 담겨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 지혜로운 신 분들도 있을 수 있다. 몽골의 군대가 물리력을 동원해서 쳐들 오는 판국에, 절에 모여서 글자를 파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훈련을 하고 물리적인 대비를 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심도 있게 관찰해 보면 그런 의지가 고려 안에 있었기 때문에, 흩어져 무너지지 않고 나라, 그러니까 '서로'를 지킬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그와 비슷한 사례를 오늘의 우리나라에서 다시 보고 있다.
4. 처음에는 당연히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움직이던 사람들이, 조금 후에는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며 행동하기 시작한 것을 우리는 안다.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생활의 일부를 양보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합리적이고 선진국이라 불리는 여러 나라들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불필요한 문화적 행태라고 치부하는 소리에도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과학적 근거나 산술적 수치(數値)에 마냥 구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반가운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당장에 상식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자발적으로 해가고 있고, 그 결과로 당황스럽게 찾아왔던 어려움이 차차 안정되어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5.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짧은 문구로 표현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은, '안전거리 두기'로 표현할 수 있는 자칭 합리적이라는 어떤 이들의 모습보다 더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서로에 대한 배려를 담은 거리 두기는 '나'만이 아니라 '너'를 포함한 다수를 안전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나'를 지키기 위한 거리 두기는 단 한 사람만을 안전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이서 함께 맞서는 것과 혼자서 맞서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인지는 우리의 이웃인 야생동물들도 본능적으로 아는 일이다.
게다가 상당 시간 거리를 둠으로 인해서 사회 구성원 간에 각자도생을 하고자 하는 분리현상인 사회의 원자화라는 문제 역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리두기에서는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식적인 행동이 그것을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한 사람들의 선택보다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6. 그리고 그런 합리적인 선택의 모습이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는, 어느 날 작은 방에서 애쓰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무명의 한 인간이 처한 고달픈 역경을 이겨내는데 큰 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 말을 쓰려고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듯한 이야기들을 지금까지 길게 한 것이다.
그러나 웃기려 하거나 허무함을 느끼게 하려는 결론은 아니다. 누군가의 배려있고 사려 깊은 마음은, 당장의 수치로 보이거나 어떤 극적인 보상을 나타내지 않더라도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코로나19에 발목 잡혀서 전진하는 속도가 더뎌지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진다고 해도, 또 어느 날 갑자기 안타까운 집단 발병으로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을지라도,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이제껏 우리가 한 일이 의미 없다는 입냄새 나는 이야기를 누군가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뻔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기 위한 것이다. 그건 입냄새 나는 그들이 얻은 것이 없어 내는 투정일 뿐이다.
7. 이제까지의 우리의 행동은 어떤 수리적 수치를 전시해서 자랑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최대한 서로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마음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처럼, 그동안 여러분의 행동으로 표현한 모두의 마음은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역경을 이겨낼 힘을 이미 전한 것이다.
그 작은 사례가 이 글의 주제이자 목적이었던(?) 상단의 그림이다. 글의 주제가 그림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은 실제로 주제가 글을 서술해 가면서 바뀌었기 때문이다.
8. 그동안, 글은 건축과도 같다는 말을 깊이 염두하며 살아왔다. 체계를 갖추고 글감을 잘 다듬고 준비해서 차곡차곡 이치와 논리에 맞게 쌓아가는 것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아무 글도 쓰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중간에 올릴 벽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바로 아래 벽돌은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생존을 위해서는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림을 알리기 위해선 글을 써야 했다. 그래서 벽돌을 가지고 수직으로 쌓아가는 건축을 해보기 전에, 있는 재료들을 바닥에 그저 늘어놓아 보려고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지만, 어떤 구슬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목걸이를 디자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9. 그런 의미에서 이 번 글은, 이 번 그림을 그려간 과정처럼 작성한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풍경화 초보이기에, 그림을 어떻게 그려나가야 원하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경험이라는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예측이란 것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표현방식의 전체적인 디자인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당장 필요한 것은 대작을 그려보려는 의욕이나 개성적인 표현법을 단번에 얻어내겠다는 야욕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경험이라도 더 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경험하기로 하고 그림이 그려지는 대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려지는 대로 그리는 일은 목표를 가지고 있을 때는 상당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일이다. 목표를 향해가야 하는 한시가 아까운 순간에,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동안 걸어온 방향의 정반대로 가게 될 수 도 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 설정한 그 목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애초에 '정해진 답'이라 것이 있는 분야는 세상에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하지 않게 되돌아가는 길에서, 의도치 않은 '적절한 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려지는 대로 완성한 이 그림을 통해서 '적절한 답'을 얻었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완성이라는 하나의 경험을 통해서, 막막함과 지루함에 대처해 본 사례를 하나 얻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이전에는 전무해서 막연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음 연습에서는 하나의 길은 알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10. '하나의 길'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제 '다른 길'로 '방향'을 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 그리고 그렇게 또 다른 경험들을 통해서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몇 가지 목적으로 그저 그려야 할 이미지일 뿐이었던 대상이 이탈리아의 피렌체라는 실제 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지루함 속에서 의미도 없이 단순히 그려내기에 급급하던 작업이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되고, 그때에 비로소 내가 무엇을 그려나가야 할지 알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이 그림이 '풍경화'에서〈꽃이 피는 곳〉이라는 제목을 가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치, 많은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배려로 성실하게 정진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의도치 않은 하나의 큰 긍정적 정체성을 획득해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1. 회복 시작 후 28번째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