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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 백 Oct 03. 2018

에브리데이 Every Day, 2018

매일(Everyday), 자아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의 이야기






감상 후기(브런치 무비 패스) - 에브리데이 Every Day, 2018

로맨스/멜로 | 미국 | 2018.10.11 | 97분, 12세이상관람가 | 감독 마이클 수지 | 앵거리 라이스, 저스티스 스미스, 오웬 티그, 제이콥 배털런, 루카스 제이드 주먼




매일(Everyday), 자아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의 이야기.   




1. 

영화 <에브리데이>는 원래 관심이 있던 영화가 아니다. 일단 ‘외모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도 사랑한다’라는 명제에 동의가 안 되기도 하고, 10대의 사랑에, 공감은 가능할 수 있지만, 몰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맨스 영화에 ‘연인들의 사랑’이라는 주제 말고 과연 다른 주제를 담았을까 하는 편견도 한몫을 했다.


그런데 왜인지, 어느새 시사회가 열리는 용산의 한 상영관에 앉아있다. 다른 시사회에서 흔히 보는 모녀 커플, 그리고 이번에 처음 보는 10대 교복 커플, 그리고 그냥 커플들의 보기 좋은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영화는 시작하고, 익숙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으므로 이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다. 실제로 당시에 영화 내용을 간단히 기록하는 메모에 삐뚠 글씨(어두워서)로 이렇게 적혀있다.


‘처음부터 지루하다 ㅠㅠ’


다행히도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지루함은 사라진다. 하지만 외모가 바뀌는 사람을 사랑하는 주인공에게 몰입이 되지는 않고, 공감도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상대역의 배우들이 내 취향(?)이 아닌 것도 한몫한다. 물론 그건 취향일 뿐, 영화의 잘못은 아니다. 뭔가 먹긴 먹었는데, 뭘 먹었는지 모르겠는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오면서 든 생각은, ‘그냥 10대들의 영화야.’라는 것. 그런데 나중에 깨달았지만 이건 다소 섣부른 판단이었다.


* 이 아래로는 영화의 주제를 소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집으로 돌아오면서 영화의 내용을 좀 더 곱씹어 본다. 창작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창작의 노고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 지키고 싶으므로. 영화가 가진 장점을 생각해 보고,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단지 사랑이었는지 다시 살펴본다. 하지만 이야기의 장점을 찾으려는 마음은 이내, 메마른 감성의 텃밭에 허무하게 흩뿌려질 뿐이다. 왜 이렇게 감성이 메마른 걸까라는 질문은 포기의 다른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니 사정이 달라진다.


사랑은 소재, 주제는 자아(自我).



문득 떠오른 단서다. 있는지도 몰랐던 이성이 발동된다. 정신은 변함이 없는데, 몸이 바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친구들이 사랑을 통해 얻게 된 생각은 무엇일까? 리아넌의 아빠와 엄마의 상황은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A가 ‘알랙산더’의 몸으로 지낼 때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거기엔 헤어짐 말고 다른 의미는 없는 것이었을까? 등등의 물음이 이어지면서 그와 동시에 영화 속에 담겨있다고 생각되는 ‘반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리아넌과 A(의 정신이 깃든 알렉산더)


이 영화는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의 외면일 뿐이다.
이 영화의 내면에는 그와는 조금 다른 영혼을 담고 있다.



3.

영화 <에브리데이>는 단순히 사랑은 외연이 아니라 내면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라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겉모습은 변해도 영혼은 변함없으니 상관없다는 일종의 진실한 사랑을 주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다. 어째든 이 영화의 장르는 ‘로맨스/멜로’ 이니까. 인정한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의 외면일 뿐이다. 이 영화의 내면에는 그와는 조금 다른 영혼을 담고 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면 이렇다.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 영화의 외연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둘러 쌓여있다. 그리고 거기에 ‘몸이 바뀌는 연인’이라는 문양으로 장식이 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그와는 다르게 이 영화의 내면은 ‘자아를 찾는 여정과 그것을 통한 성장’이라는 영혼으로 채워져 있다. 그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4.

우선 극의 주연인 10대들을 살펴보자. 먼저 ‘리아넌’이다. 리아넌은 A가 저스틴으로 처음 등장한 날, 주차장에서 A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리아나(Rihanna : 미국에서 활동하는 가수)’와 같은 이름과 헷갈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 리아넌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그리고 남자 친구인 저스틴과의 관계에서 그 혼란스러움은 잘 표현되고 있다.


리아넌과 A(의 정신이 깃든 저스틴)


다음은 당연히 또 다른 극의 주연인 ‘A’이다. 이야기 후반이 되기 전까지는 A는 전혀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인생을 경험하면서 단단해지고 지혜로워진 것이 느껴진다. 따뜻하고 넓은 마음은 차분함의 극치다. 그런 그가 타인의 몸에 좀 더 머무르려는 시도를 하면서부터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몸을 빌려 생활하는 동안에 그는, 매우 혼란스러운 심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물론 리아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알렉산더의 삶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충돌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혼란의 표면적 이유일 뿐, A의 혼란의 심연 속에 자리한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남은 인물들은 리아넌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리아넌의 아버지가 겪은 우울증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는 혼란이다. 또 남편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에 따른 리아넌의 어머니가 겪은 혼란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런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한 사람은 생계를 책임지려고 고군분투한다. 리아넌의 어머니가 정말로 바람을 피웠다면 그것은 바로 그 혼란의 잔여물이다. 이렇듯 ‘혼란’은 주인공인 10대 만이 아니라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5.

그렇다면 이들의 혼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물론 이에 대해선 이미 앞서 답을 내렸다. 혼란이 의미하는 바는 인물들의 자아가 흔들리고 있음을 뜻한다. 리아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있고, A는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찾고 있다. 그리고 리아넌의 아버지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며, 리아넌의 어머니 역시 변한 남편과 가장이라는 무게 아래서 자신을 잃고 헤매고 있다.  



자아를 찾는 여정과 그것을 통한 성장.



6.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가 처한 혼란을 겪으며 ‘정답이 아닌’ 어떤 ‘하나의 답’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답은 그 들이 혼란했던 이유와는 다소 다른 지점에서, 하지만 자연스럽게 발견된다.


 리아넌이 겪은 혼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대의 무관심으로 촉발된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타인의 관심을 통해, 리아넌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주는 것과 같이 그녀에 대해 상대가 알아주는 것을 통해, 리아넌의 자아는 확립되는 것이다. 즉 리아넌의 정체성 확립의 주체는 타인이다. 극 초반에는 저스틴이 그러한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A와의 사랑을 겪으면서 그 방향이 서서히 변화된다.



A를 통해 다양한 사람을 겪으면서 리아넌의 갇혀있던 시야가 열린 것이다. 감독은 그 시야가 결정적으로 열린 순간을, 다소 노골적으로 리아넌의 이상형과 정반대의 외모를 가진 인물과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으로 표현을 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키가 크고 마르고 어깨가 멋있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운동 좀 해야 할 것 같은 덩치가 좀 있던 친구’와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이 유달리 길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A(의 정신이 깃든 운동 좀 해야하는 친구)와 리아넌


A와의 사랑을 통해서 리아넌이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리아넌의 정체성 확립의 주체는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렇게 리아넌은 사랑을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는 만큼 부모님을 이해하게 된다. 이 역시 성장이다. 그리고 그 이해를 통해 부모님을 설득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전에는 할 말이 있어도 가족에 쉽게 말하지 못했던 기존의 자신의 모습을 넘어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리아넌의 언니는 대견하다는 듯 미소 짓는다.


 A는 리아넌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종종 생각해 본 것으로 보이지만,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하나의 모습에 정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아넌을 사랑하게 되면서 A는 정착할 이유를 찾게 되고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정착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A가 정착을 하려면 결국 누군가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잠잠히 감추어져 있던 A의 혼란이 표면으로 나오게 된다.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수많은 사람을 겪으며 바랐던 이상향을 만났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타인의 모습은 결국 타인의 것일 뿐 결코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없다. 타인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A는 알게 된 것이다.



결국 A는 리아넌과의 사랑을 하고 또 그를 위해 자신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이제까지 타인의 여러 모습 중에서 자신을 찾아왔던 것이 잘못된 방향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A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벗어나 미래의 경험으로 향하는 것이다. A가 리아넌을 사랑함에도 그렇게 쉽게 떠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신의 자아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리아넌과의 사랑은 어쩌면 진짜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의 소재가 던져주는 표면적 주제와는 상반되지만 말이다.


 영화 속에서 리아넌의 아버지는 떠오르는 타인들의 얼굴들을 그림에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데, 그러한 행위를 딸이 바라봐 주고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화가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리아넌의 어머니의 경우엔 가족의 모든 삶을 감당하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없애야만 했을 것이다. 즉 리아넌의 어머니는 혼란에 빠진 것이라기보다는 포기한 상태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자신을 누구의 엄마나 아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대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뺏긴 것인지도 모른다. 외도를 정당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것을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다. A가 리아넌이 되었을 때 리아넌의 어머니는 함께 쇼핑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 제안을 리아넌(실제로는 A)이 흔쾌히 수락하자 기뻐하는 모습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가족들이 잡아주길 바라고 있었음이 확연히 표현된다.


자아를 확립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찾는 일은 물론 자신의 책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더 많다. 그 부족함을 온전히 채워주는 것이 바로 타인의 인정과 환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가족의 인정과 환대는 그 무엇보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다.



7.

이제 정리를 해본다. 영화 <에브리데이>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연인 간의 사랑에 관한 것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자아의 성장을 이루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리아넌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던 막연한 모습이었지만,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해가 넓어짐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에서 그런 리아넌의 성장을 확인한다.


A는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 타인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했고,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만이 아니라 미래의 경험 역시 자신을 정의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제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또다시 여정을 떠난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경험하겠지만, 깊어진 시선은 결국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될 것이다.


리아넌의 부모는 자신의 변화로 인해 정체성을 겪고, 그런 배우자의 변화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했지만, 다행히도 성장한 딸의 인정과 환대로 그들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 전환점을 마련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여전히 자아를 찾아 하루하루,
그렇게 매일(Everyday)을 살고 있는 것이다.



8.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발견한다. 우리는 10대 시절 어떤 사람이 될지 도무지 알지 못해서 답답해했다. 속 시원히 알려주는 사람은 없고, 공부 잘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어른들에게 배웠다. 꿈을 꾸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기에,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이 사람 저 사람 또는 이 것 저것을 동경하며 자기의 미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예인이 되고 싶었고 공무원이 돼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대학이라는 이상향에 도달해봤지만 그곳에서 진정한 자아를 성립하긴 어려웠다. 취업이라는 새로운 이상향에 도달했지만 마찬가지로 자아를 찾기는 더 어려워졌다. 생각했던 것과  실제는 달랐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자아를 찾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 진정한 자아는 타인이 제시해 놓은 기성의 모델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인생의 어떤 시기를 만날 때마다 자아는 흔들리고 또 때로 잃어버린다. 나이와 경험이 많아도 여전히 우리는 흔들린다. 결국 우리는 모두, 여전히 자아를 찾아 하루하루, 그렇게 매일(Everyday)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에브리데이>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방황의 열기를 해소해줄 나름의 해법들을 조심스레 처방한다.


“너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해줄래?”
“삶이 버거울 땐, 쉴 필요도 있는 거야.”
“아는 걸 쓰고, 보이는 걸 그려라.”
“이 번에는 버텨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변해도……. 우린 모두 변하니까.”
‘자신을 돌아보라.’
‘위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9.

우리는 여전히 누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인간사를 겪으면 서도 말이다. 물론 어쩌면 이미 우리는 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는 변한다. 만약 결국 그렇게 변화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자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자세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좋을까?



10.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화 후반부에 알렉산더가 된 A가 리아넌의 손을 잡고 신나게 어디론가 달려가는 장면이 있다. 그때 리아넌이 당황과 설렘이 섞인 목소리로 자신을 이끌어 가는 A에게 웃으며 묻는다.


“What is happening? Where are we going?!” 


“무슨 일이야? 우리 어디가는 거야?!” 


어쩌면 이 친구들의 모습이, 앞선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이 글의 모든 이미지 출처는 Daum영화 입니다.(단, 브런치 무비 패스 이미지는 브런치가 출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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