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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여자#09] 오래전 집 나간 음악을 찾습니다.

by 꼰대 언니

“카세트 주둥이처럼 입이 나왔구나. 알았어. 사 줄게.”

엄마가 한참 모자란 생활비에서 몇 달 모아 사준 빨간색 스테레오 더블데크 카세트.


공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라디오 DJ의 다음 곡 멘트를 기다리다, 번개보다 빠르게 녹음 버튼을 누르느라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었다.


빨간 스테레오를 들인 이후 나의 생활 반경은 달라졌다. 일본 음악잡지를 사느라 헌책방을 드나들었다. 좋아하는 밴드의 브로마이드가 들어있는 호를 사면 계를 탄 듯 기뻤다. 귀로만 듣던 음악이 뮤직비디오라는 신문명을 만나던 80년대, 변두리 중학생은 용돈을 모아, 레이저디스크를 틀어주는 일식당까지 먼 길을 걸어가서 우동정식 하나를 시키고는, 서너 시간을 마돈나언니와 프린스 오빠, 듀란듀란에 넋을 놓았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나에게는 음악만 있으면 뭐든 괜찮았던 시기였다. 첫사랑에 가까운 덕질부터, 자잔한 취미활동까지 삶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음악이었다.


첫 빨간 스테레오는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 덩치 작은 친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삼성 마이마이를 지나 소니 CD플레이어를 거쳐, 대학에 당도하였다. 혼자 방에 틀어 밖혀 음악이나 듣는 나였는데, 알고 보니 또래들과 시시덕 거리며 어울리는데 시간이 모자라더라. MBTI 대문자 E로 성향을 확정한 후로는, 밖으로 떠도느라 바빠진 나에게, 음악은 클럽, 노래방에서 듣는 배경으로 전락했다. 눈을 감으면 머리 속에서 울리던 음악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음악과 멀어진 30년, 조금씩 혼자 있는 시간이 늘고 있는 요즘, 문득 음악이 그립다. 그저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존재. 굳이 고급 진 스피커를 타고 흐르진 않아도 내 늙은 귀가 알아들을 정도의 데시벨.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노랫말이 흐르면 좋겠다.


어제는 실로 오랜만에 너드 커넥션의 컨서트에 갔다. 사방을 감싸는 기타와 베이스, 보컬의 사운드가 실로 오랜만에 내 온몸을 적셨다. 찔끔 눈물도 났다. 어떤 음악도 나를 다시 열세살로 돌려놓을 수 없기를 알기에. 빨간 스테레오가 다시 돌아 올 수 없듯이,

너드 커넥션의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가사처럼 사라질까봐 아쉽다.


“안녕 마지막 인사가 되겠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다신 볼 수 없기에

자그만 행복을 남겨두고 가요.

...

난 당신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사라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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