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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자#20] 나비는 날아오르면서 집을 버린다

N잡러의 마음자세

by 꼰대 언니

공채 출신들은 공감하겠지만, 입문교육이라는 세뇌과정을 거치고, 입사동기라는 정신적 유대 준거집단을 뒤에 두면, 그들의 피는 회사 로고 색깔로 염색된다.

23년 근속 기간 동안, 회사를 내 발로 떠난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지 못했다.

이직을 고민하던 후배나 팀원과의 면담에서 나의 메시지는 일관되었다.

"이 좋은 회사를 왜 떠나?"


임원 계약 해지를 당하면서, 하루아침에 방(까지는 아니더라도 파티션) 빼고 쫓겨난 처지는 막막했다. 퇴사 후 며칠 지나, 매일 출근하던 용서고속도로와 익숙한 빌딩을 지날 때, 가슴이 아리기까지 했다. 첫사랑과 헤어진 여자아이처럼. 그곳엔 여전히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 내가 좋아하던 공기가 흐르고 있겠지?! 아련한 그리움과 정든 곳을 떠나 구천을 떠도는 피로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첫 회사의 바깥세상은 험했다.

나를 알아주던 사람들이 부재한 곳에서, 나를 드러내야 했는데

옛 회사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새 회사에서의 변화한 모습 이어야 했다.


그들은 몇 가지 선입관을 밑창에 깔고 나를 본다. 냉소적인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거들먹거리기나 하겠지. 실무는 제대로 해낼까? 그러면 그렇지 이것도 몰라? 전 회사 자랑 좀 그만하지!


이십 년간 쌓은 경험은 새로운 분야에서는 그리 쓸모없었다. 모르는 업계의 단어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온다. 새로운 약어에 생각이 멈춰 맥락을 놓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회의마다 녹음을 하여 다시 들었다.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은퇴 밖에 할 것이 없다는 절박함이 나를 지배했다.


퇴사 후 첫 회사에서 마련해 준 단기 계약직 산학협력 교수로 대학에 있으면서, 말 그대로 골방에 갇혀 있던 시기, 나는 절대로 혼자서 무언가를 해낼 사람이 아니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게다가, 40대 중반을 갓 넘은 은퇴 각 잡기에는 이른 나이이기도 했다. 돈 문제는 차치하고.


첫 퇴사로부터 10년, 새로운 회사들로 갈아타기를 네 번 했다. 삼사 년 지나면 짐을 쌀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 조직에서 낸 성과가 주변의 기대보다 못 미치거나, 그 회사에서 내 삶이 내 바람보다 못하거나, 새로운 기회가 날 찾아오거나,...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입사 동기와 같이 끈끈한 친목집단을 만드는 것은 어느 회사에서나 가능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나의 시간 투자, 마음 투자에 따라, 친밀감은 비례했다. 떠날 때마다 OB 모임이라는 집단이 생기더라.


고향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불안해 한 시간을 새로운 자리에 대한 열정으로 채울 수 있다면 N잡러가 되는 것도 그리 고되지만은 않다. 나는 어디 가서 든 맨땅에서 구를 수 있다. 다시 하면 되지!라는 의지만 사라지지 않은다면.


나비는 날아오를 때 이미 집을 버린다고 한다. AI가 인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나는 또 새로운 일자리에 나를 적응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 노동에 가까울 것이다.

높게 날아오르지 않아도 낮은 곳에서도 충만한 순수한 일의 기쁨으로 채울 수 있기를.


나비는 길을 묻지 않는다/박상옥



나비는 날아오르는 순간 집을 버린다.

날개 접고 쉬는 자리가 집이다.


잎에서 꽃으로 꽃에서 잎으로 옮겨 다니며

어디에다 집을 지을까 생각하지 않는다.


햇빛으로 치장하고 이슬로 양식을 삼는다.

배불리 먹지 않아도 고요히 내일이 온다.


높게 날아오르지 않아도 지상의 아름다움이

낮은 곳에 있음을 안다.


나비는 길 위에 길을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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