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쏠이지만 언젠가는 결혼하겠지? 딸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심장은 너를 처음 만난 날을 잊지 못한다.
붉은 악마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여름의 시작, 후텁지근한 바람이 반쯤 열린 창으로 살랑였고, 의사는 독일과의 월드컵 결승전을 어떻게 든 보러 갈 요량인지, 진통의 진척이 없는 저녁이 길어지자 메스를 들었다.
100일의 기도와 첫 번째 시험관 시술로 너를 가졌을 때, 그저 건강히 태어나주면 평생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겠다고 맹세한 터라, 갓 태어난 너의 새초롬한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쁘지 않아도 되는데!"
나의 말과 행동에 너처럼 반응해 주는 이를 만나본 적 없는 탓에, 나의 삶은 너와 함께 달라졌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한 너와 처음으로 손을 잡고 걷던 봄날 남산공원, 세상이 나의 것 같았다.
너에게 남동생이 생기고부터, 우리 사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시 탐탐 아기에게 군밤을 먹이고 달아나는 네가 처음으로 얄미웠다. 너의 입꼬리가 야릇하게 올라간다.
"나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동생 좀 때려야겠어!"
미운 네 살, 압구정역 아동심리 상담소를 찾았다. 너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고, 여러 장의 그림 속 내 모습은 일관되게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취조 후 피의자가 극적으로 전환되는 범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담의 대상은 네가 아닌 나로 바뀌었다. 너는 100% 나에게 향하는데 나는 너에게 100%를 주지 못하고 있다 했다. 일 핑계로 너에게 소홀해 왔던 내 모습은 눈물 콧물의 그날 상담 후로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도돌이표같이 다시 반복되었다.
너의 사춘기는 내가 알지 못한 채 지나갔다. 집에 주 세 번 오시던 아주머니는 말씀하셨다, 네가 며칠 참 힘들어했다고. 단짝 친구가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 뒤였다. 승진을 한답시고 올인하던 터라,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한두 해 동안, 금방 도둑이 들은 모습이었던 너의 방이 어느새 말끔히 정돈되더니, 너는 나에게서 한 발짝 더 멀어졌다.
기숙학교와 유학을 거쳐, 너와 내가 함께 나누는 짧은 대화는 연중행사가 되어 왔다. 방학 집에 돌아온 너는 고양이들과 방 안에서 틀어박혀 있거나, 게임을 하거나, 대낮 도깨비 같이 요란하게 화장에 그물 같은 옷을 걸치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 거나.. 내가 잔소리라도 하려 입을 열면, 너의 작은 입이 삐죽거린다. "뭐래!"
급한 일이 생기면 너는 아빠부터 찾는다. 기숙사 주방에서 해 먹는 요리의 레시피도 아빠에게 물어본다.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너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네 샴푸향기를 맡을 때 나는 피로가 풀린다는 것을.
오늘 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예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다. 옆의 낯선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함께 만드리라는 기대감보다, 가장 최악의 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어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나를 엄습한다.
이 남자, 너의 화장 안 한 모습을 본 거 맞지? 주말 내내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습관이해하지? 매일 시켜 먹는 마라탕 함께 맛있게 먹어 줄 수 있는 것 맞지? 올바른 부모님 밑에서 바르게 자란 놈 맞지?
문득, 너를 보면서, 오늘의 너를 가장 보고 싶어 하셨던 나의 어머니가 그립다. 너의 퉁명스러움도 내가 그녀에게 했던 싸가지의 반도 안 되지. 네 험담이라도 하려 하면 생전 그녀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우리 애는 세상 누구보다 착해!"
그래! 너는 세상 누구보다 착하다. 너의 선함이 최악의 순간에서 빛을 발하리라는 생각에 나는 이제야 안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