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마 Oct 15. 2020

쿨하게 회고하고 싶은데

되려나 모르겠네.

 박사를 끝내고 영국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나에게 있어 박사 생활은 내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강렬한 ‘체험’이다. 경험이 아닌 체험인 이유는, 그만큼 유학생활은 내 몸과 마음을 다이내믹하게 뒤흔드는 날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에 도움이 될 결정적인 논문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드는 날엔 하늘을 나는 것 같다가도, 다섯 문장도 제대로 완성 못한 날에는 몸이 땅 속으로 꺼지는 것 같이 무거웠다. 


2년 차에 PhD candidate 시험을 무사히 끝내고 한국에 들어갈 일만 남았는데,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5분만 가면 집인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풀리고 식은땀이 나면서 도저히 걸어갈 힘이 나지 않아 쉬었다 가길 반복했다. 몸이 허해졌나, 장어를 먹어야 하나 하다가 한국에 돌아와 검사를 받았지만 이상은 없단다. 내가 영국에서 공부하고 방학이라 들어왔다고 설명하자 의사가 묻는다. "혹시 옥스퍼드에서 왔어요?" 알고 보니 옥스퍼드 대학에 다니는 남학생이 나와 똑같은 증상으로 찾아왔단다. 결론은 우리 둘 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사진도, 내 논문도 아직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직 그때를 쿨하게 회고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돌아보고자 한다. 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이 체험을 통해 내가 성장했음을 확신하고, 또 현재의 나를 만들어 주었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회고하고 싶다.


지금 책상 위에는 박사논문 인쇄본과 박사를 시작하며 처음 쓰기 시작했던 리서치 저널이 놓여 있다. 리서치 저널은 지도교수였던 Claire Pajaczkowska(이하 클레어)가 추천했던 리서치 방식이다. 아무렇게나 뻗친 은발의 단발머리를 한, 파란 유리알 같은 눈을 가진 클레어는 첫 학기가 끝날 즈음 어느 날 나에게 "리서치 저널을 써봐.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 난 일기가 논문을 완성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두껍고 작은 노트를 하나 준비하고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리서치 저널은 10권이 되었고,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박사심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앞으로 1년여 동안은 수업을 두어 개쯤 맡고선 여유롭게 지내는 시간을 가져볼 심산이었다 (건방지도다). 귀국한 지 2주 후 우연히 교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고, 운 좋게도 바로 서울의 한 대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강의, 논문 연구, 작업, 대학원생 지도, 각종 행정 일이 휘몰아치는 교수 생활에 익숙해져 지내고 있다.


앞으로의 글들은 영국에서의 나의 박사 유학 생활과 대학교에서의 생활을 중심으로 쓰일 것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공부하고, 교육하고, 일하는 내 삶과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공감이 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