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마 Sep 24. 2022

자라나는 꿈나무 40대

80대 전성기를 꿈꾸며 

Rose Wylie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께서 "진주는 화가가 되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화가'라는 단어. 너무 멋진 걸. 멋진 화가 아가씨가 곧 될 것 같아!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내 꿈은 '아가씨'가 되는 것이었다) 가슴이 뛰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덧붙이셨다. "그런데 화가는 돈을 많이 못 벌어." 나는 매우 세속적인 어린이였나 보다. 가난하고 어렵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화가는 안되겠어, 난 공부나 하련다 마음먹었다. 


20대 중반쯤 나는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싸이월드를 훔쳐보곤 했다. 그녀는 나보다 많아야 5살 정도 위였을 텐데 무언가 내가 흉내낼 수 없는 퇴폐적 분위기를 풍겼기에 당시 나에겐 꽤 멋진 여성으로 비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그림이 좋았다. 과슈로 그린 무광의 컬러풀한 이미지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저렇게 그림 그리면서 살고 싶다 생각했었다. 옷 입은 여자들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곤 뭐... 취직하고, 공부하고, 돈 벌고 살면서 그때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얼마 전 양평의 한 미술관에서 샹탈 조페(Chantal Joffe)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큰 캔버스에 아름다운 색감의 옷과 배경에 둘러싸인 인물들. 나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리고선 갑자기 잊고 있었던 내 꿈이 번쩍 떠올랐다. 

아, 맞다! 나 그림 그리고 싶어 했었지!


설레서 배가 간질간질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조페의 그림과 영상과 인터뷰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봤다. 인물을 주로 그린 아티스트들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화풍의 작가는 재미있게도 모두 여성 작가였다. Alice Neel, Jenni Hiltunen, Helene Schjerfbeck, Joan Eardley 등 다들 다른 시대, 다른 환경과 지역,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인물들을 개성 있게 그린 작가이다. 


그중 로즈 와일리(Rose Wylie)는 나를 가장 꿈꾸게 한 작가다. 와일리는 미술을 전공하고 20대 초반에 결혼해 가정을 꾸리느라 작업을 하지 못했다. 영국 시골에서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아이들을 양육하느라 작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작업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자신은 작가라고 생각했단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가난한 팔자 탓을 하고, 때로는 남편을 원망하거나 자식에게 '내가 너 때문에 나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뭐 이러면서 보냈다면 이해가 갈 텐데 말이다. 


그녀의 이러한 마인드셋은 어느 정도 자식들이 성장한 후, 40대 중반을 막 넘어설 때 Royal College of Art 대학원에 입학하는 용기를 이끌었다. 와일리라면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정말 신나게 (그들과 잘 어울리거나 또는 마이웨이로) 작업했을 것 같다. 그리고 졸업 후 그녀는 계속 시골집에서 작업을 지속하다가...76세에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된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90을 바라본다. 여전히 핫한 그녀다. 재작년에 서울에서 개인전도 했다. 그녀의 그림을 먼저 보고 그녀의 나이를 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나의 짧은 표현력으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다양한 그림 소재들의 예상 불가한 조합과 사랑스러운 컬러 팔레트로부터 90세의 할머니가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윤여정 배우님을 떠올렸다. 자신의 분야에서 누가 뭐라 그러든 말든 그냥 쭉 해냈기에 늦은 나이에 인정받은 여성들. 그녀들을 보며 40대 초반의 나는 꿈을 꾸며 이제 막 시작해야 하는 나이인 것임을 깨닫는다. 확실히 내 몸은 노화가 진행되고 있으나,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나에게로 향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무엇이 나에게 가치가 있는 일인지 작년보다 올해가 더 명확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 40대는 자라나는 꿈나무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꾸 어디가 아프니, 젊은게 절대적으로 예쁜 것이니 그런 말 좀만 줄이자...)


요즘 나는 개인전을 열어 친구들을 초대하는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하며 오일파스텔로 그림연습을 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100년 클래식’ 트렌치코트의 변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