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쳐온 순간들에 대한 늦은 인사
벽에 걸린 시계가 멈춰 있는 것을 알아챈 건, 아주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시계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익숙해져 버렸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배터리가 다 된 것뿐일까. 시침과 분침은 같은 자리에 붙박인 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몇 시를 가리키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멈춰 버린 시간이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멈춘 시계를 이제야 바라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부터 멈춰 있었을까.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리려다가,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시선이 머물렀다. 왜 나는 이 시계를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왔을까. 그러다 문득, 나 역시 이 시계처럼 어떤 순간엔 멈춘 채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바쁘게 살아왔다. 해야 할 일, 지켜야 할 약속, 놓쳐선 안 되는 기회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시간에 쫓기며 살아왔다. 손목시계든 벽시계든, 늘 시간을 확인했고, 시간에 맞춰 움직였다. 하지만 그 바쁜 시간들이 내 삶을 진짜로 채워준 적은 얼마나 되었을까. 시간은 그저 흘렀고, 나는 그 흐름 속에 무심하게 휩쓸려 다녔다. 어떤 날은 영혼 없이, 어떤 날은 목적 없이. 열심히 달렸지만, 정작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아볼 틈조차 없었던 날들이었다.
젊은 날에는 가족의 전화조차 미룰 만큼 바빴던 적이 있었다. 친구라는 존재조차 이유 없이, 때로는 변명조차 없이 흘려보낸 적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이 먼저였는지’ 따지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그땐 몰랐다.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그리고 지금의 이 시간도, 언젠가는 그리워할 젊은 날이라는 사실을.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지금 이 순간의 귀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안다. 그 시절 나눴던 대화, 함께 웃었던 순간, 따뜻한 눈빛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한 것들이었는지를. 그때 조금만 더 마음을 내보였더라면, 아낌없이 표현했더라면 덜 후회했을까. 흐릿한 표정 대신, 작은 애정이라도 담았더라면 어땠을까.
후회를 먼저 안 사람이 조금 더 빨리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제야 나는 내 마음속 어른스러움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멈춘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알려주진 않지만, 나에겐 시간을 돌아보게 해주는 거울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을까. 가끔 그런 회의감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어김없이 "나이 탓인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합리화한다. 언제부턴가 무엇이든 망설여질 때마다, 그 이유를 나이 탓으로 돌리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우리는 늘 ‘흐르는 시간’에만 집중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멈추는 법을 잊고 산다. 하지만 인생에는 멈춰야 할 때가 있다. 그 멈춤은, 어쩌면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시계는 여전히 멈춰 있다. 나는 아직 고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시계는 나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도 괜찮아.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 번쯤 생각해 봐.”그 말이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앞으로는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다.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날들로 만들고 싶다. 시간은 계속 흐르겠지만, 그 흐름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절박한 긴박함이 아닌, 느긋한 여유로 시간의 촉감을 느끼며 천천히, 그러나 온전히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