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몰랐다

이름들 사이에서 역할이 아닌 진정한 나의 이를 찾고 있다.

by 김종섭

예전에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을 보는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얼굴에 뭐가 묻지나 않았을까 싶어 일상을 시작하며 무심코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다. 거울 속 나의 모습은 늘 자신만만했다. 피부에 큰 흠도 없었고, 얼굴에 바르는 스킨조차 귀찮게 느껴질 만큼 외모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거울 속 내가 낯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낯선 모습을 외면했다. 그러다 요즘은 마치 오래된 사진을 정교하게 인화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사진은 내가 살아온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사진 찍는 일이 싫어진다고들 말한다. 그 말이 요즘 들어 뼈저리게 와닿는다. 사진 속 내 모습은 정겹기보다는 지나간 시간의 깊은 주름만 남아 있다.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눈가의 피부는 점점 늘어나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보인다. 예전엔 자고 일어나 눈이 부어도 그럭저럭 봐줄 만했는데, 이제는 그런 말조차 스스로 위로처럼 들린다.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아니, ‘예전의 나’라는 존재가 정말 멋졌던 적이 있었나? 이 질문이 의심스럽기도 하고 생각을 좀 더 가지고 가면 스스로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어느 순간 과거와 현재의 내가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참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아버지, 남편, 누구 아빠, 과장님, 이사님, 아들, 사위, 선배, 아저씨… 지금은 또 다른 이름이 불릴 차례다. 아마도 그 이름은 ‘할아버지’ 일 것이다. 그 이름이 내 인생의 마지막 호칭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불렸던 수많은 이름 중에서, 진짜 '나'로 존재했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어딘가에 무심코 내려놓은 채, 이름들이 만들어낸 역할에만 집중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그 이름들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정작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 이름들이 그립다. 어떤 이름은 다시는 불릴 수 없고, 어떤 이름은 영원히 불러져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땐 벗어나고 싶었던 이름들이 지금은 허전함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 이름들 모두를 사랑하지 못하고, 일부에만 집착하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당신하고 싶은 거 해요.”

아내가 가끔 나에게 자유를 주듯 그렇게 말해준다. 예전엔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제는 명예도 돈도 아닌, 정말 하고 싶었던 일들에 날개를 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정작 하려 하니, ‘무엇을 하고 싶은가’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는 건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덩달아 요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랜 시간 역할에 몰두하며 살아온 결과, 내 진심과 본질이 점점 희미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마음속 어딘가에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행은 없었다. 그저 감정의 흐름을 따라 떠다니는 생각들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생각들조차 낯설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지만, 그 시작점이 너무 멀게만 느껴져 가슴이 아려온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다시 찾아보려 온갖 가지고 있는 수단들을 총 동원한다. 그중에서 유일한 하나가 글을 쓰면서 나를 들여다보고, 잊고 있던 감정들도 순서 없이 무작정 꺼내보고 있다.


나는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그때는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마음이, 후회처럼, 아쉬움처럼 가슴 깊이 스며든다.


생각해 보면, 방금 전 생각도 금세 바뀌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데, 어떻게 한결같이 나를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겠는가. 요즘은 행동반경이 좁아져서일까, 하루하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어쩌면,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온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지켜준 보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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