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캐나다의 시차 속에서 나눈 약속, 인생 2막의 새해 다짐
두 개의 시간을 가지고 산다는 사실을 요즘 연말과 새해의 경계에서 새삼 실감한다. 캐나다와 한국의 시차 때문에 우리는 해마다 새해를 두 번 맞는다. 먼저 한국의 시간이 2026년을 열고, 하루가 지나서야 캐나다의 시간이 그 뒤를 따른다.
어제 한국 시각 자정 12시 정각에 맞춰 한국에 살고 있는 큰아들과 며느리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다. 그 순간 카카오톡이 잠시 멈춰 섰다. 보낸 메시지는 3분이 지나서야 전달됐다. 아마도 그 정각의 시간에 나와 같은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새해 인사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디지털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정각’이라는 찰나에 진심을 담으려 애쓰며 산다.
오늘은 이곳 캐나다에서 새해를 맞는 날이다. 자정 12시,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 와인잔을 들고 조용히 건배를 했다. 이곳 풍습에 따르면 새해 첫 순간에는 곁에 있는 사람과 키스를 나눈다고 한다. 아내는 내게 키스를 청했다. 가벼운 뽀뽀쯤으로 생각했던 나는, 아내가 “그건 키스가 아니지”라며 진짜 키스를 건네는 바람에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낯설지만 따뜻한 이 문화가 60대 부부의 새해 첫 식탁에 묘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자정 정각의 시간, 아들과 며느리에게서 새해 인사가 담긴 동영상과 메시지가 도착했다.
“Happy new year!!
새해 복 많이! 많이!! 많이 받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하시길 언제나 기도할게요. 작년, 재작년 연말을 잠시라도 함께 보냈는데 이번에는 좀 허전했어요. 앞으로 더 자주 볼 수 있는 날들이 많아질 수 있게 노력할게요.”
아들은 신년 초부터 해외 출장길에 올라, 출국 전에 집에서 미리 촬영해 둔 영상인 듯했다. 화면 너머에서 전해지는 목소리에 마음이 잠시 멈춰 섰다. 새해 인사는 늘 짧지만, 가족의 마음은 언제나 길다.
사람들이 새해를 맞는 마음은 비슷한 것 같다. 자정 12시 정각, 시작의 정확성. 마치 첫눈이 내리는 날 가장 먼저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하듯, 사람들은 새해의 첫발을 선명하게 남기고 싶어 한다. 우리 역시 그 첫 흔적 하나를 남기기 위해 자정을 기다렸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아내와 서로에게 바라는 점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나는 먼저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며칠간 운전하면서 성급한 태도를 보였던 일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새해에는 좀 더 여유 있게 행동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또한 다민족 국가에 살면서 무심코 내뱉었던 인종 차별적 표현은 조심하기로 했다. 이런 바람의 말이 끝나자, 아내는 무엇이든 긍정적인 에너지를 먼저 꺼내 쓰는 남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것들은 내가 새해에 고쳐야 할 점이자,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변화이기도 했다. 아내는 이어서 내게 물었다. “그럼, 나한테 바라는 건 없어요?”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뜻밖에도 특별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대신 아내는 남편에게 단 한 가지를 부탁했다. 매일 아침 성당 미사에 참여하는 자신의 삶을 존중해 달라는 것이었다.
새해 계획을 이야기하다 보면 특히 남자들은 금연이나 금주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에 담배를 끊었고, 작년 한 해 동안은 의식적으로 술을 멀리해 왔다. 이제 60대에 접어든 우리 부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절제’보다 ‘여유’가 되었다.
물론 건강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매일 한 시간 반 이상, 1만 2천 보를 걷는 일이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건강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캐나다 사회에서 여유 있는 태도는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배려다. 어디를 가든 기다려 줄 줄 아는 행동은 곧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앞차가 잠시 늦게 출발해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기다려 주는 모습은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빨리빨리’에 익숙했던 나의 급한 성정이 아내에게는 늘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60세를 넘어서야 비로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리듬’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는다.
젊었을 때의 계획이 승진이나 급여, 성취처럼 채우는 것이었다면, 이제의 계획은 비우고 다듬는 쪽에 가깝다. 인생 2막의 문턱에서 맞이하는 새해는 결이 다르다. 이제는 나를 다스리고, 상대를 배려하며, 낯선 문화 속에서도 긍정의 에너지를 잃지 않는 삶을 목표로 삼는다.
화려한 목표는 없어도 좋다. 아내와 마주 앉아 와인 한 잔의 여유를 나누고, 하루 1만 2천 보의 정직한 걸음을 걷는 삶. 2026년, 나의 인생 2막은 그렇게 ‘여유’라는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