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주택가에서 만난 오랜 풍경... 경제관념과 이웃의 정 사이
3월 중순의 오후, 겨울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듯 빗줄기와 함께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절절히 그리워지는 날씨이다. 비가 잠시 멈춘 시간, 혹시 다시 비가 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비옷을 입고 산책길에 나섰다.
산책길 초입에서 낯설지만 정겨운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택가 도로 옆 잔디밭에 작은 간이 천막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두 명의 아이가 싸늘한 날씨 탓에 몸을 움츠린 채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집에서 가져온 듯한 빨간색 전기 포트가 놓여 있었다. 종이판자엔 삐뚤 삐뚤한 글씨로 'HOT COCO $1'이라 적혀 있었다.
이런 모습은 북미 지역에서 오랜 전통처럼 내려오는 문화라고 한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집 앞에서 레모네이드를 파는 '레모네이드 스탠드(Lemonade Stand)'를, 추운 날씨에는 '핫코코 스탠드(Hot Coco Stand)'를 차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예전에는 이런 풍경을 가끔 마주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참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캐네디언 부모들은 자녀에게 노동의 가치와 경제관념을 심어주기 위해 이런 '작은 창업'을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었다. 아이의 신분으로 직접 번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을 사보게 하는 가장 생생한 교육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이 요즘 들어 눈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 또한 빠르게 세월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읽게 된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종이 종이판지에 쓴 홍보 팻말을 목에 걸고 지나가는 차량들을 향해 소심한 홍보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멈춰 서서 핫코코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마침 산책길에 잠시 마트에 들러 세일하는 과자 몇 봉지를 사 가지고 오는 중이었다.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과자 한 봉지라도 건네주고 오려했다. 하지만 아내는 "오히려 성의가, 특히 먹는 음식이라 부담이 될 것 같다"며 만류했다.
문득 정이 넘쳐나던 할로윈 데이 풍습이 떠올랐다. 캐나다에 처음 이주하여 가장 따뜻한 인간미를 경험해 본 시간들이었다. 아이들은 할로윈 데이 때 집집마다 돌며 사탕을 얻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지만, 언제부턴가 풍경이 달라졌다.
요즘은 사탕을 비롯해 먹는 물건을 선물 받더라도 완전히 밀봉된 포장이 아니면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음식에 어떤 유해 물질이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다. 순수한 호의와 배려조차 '부담'이나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 파는 핫코코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세상은 검증되지 않은 길거리 음식을 마음 놓고 사 먹기가 쉽지 않다. 위생 문제나 안전에 대한 우려가 아이들의 순수한 시도조차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싸늘해졌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예전 우리네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방학 때 학생들이 가장 손쉽게 용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건설 현장, 일명 '막노동(막일)'이 거의 유일한 아르바이트였던 시절이 있었다. 거칠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 땀방울을 통해 돈의 가치를 배우고 훗날 소중한 추억으로 재소환되곤 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 자리 자체마저도 한정되어 있고, 경기 침체에 따라 선택의 폭이 더욱 줄어들고 있다. 아마도 학생들은 갈수록 더 빈곤하고 팍팍한 시절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절의 아르바이트는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보다 사회를 배우는 소중한 기회인데,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커져간다.
핫코코의 맛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아이들의 '노력'에 이끌려 인정으로라도 한잔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주머니에 현금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요즘은 카드나 모바일 결제가 보편화되면서 지갑에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나만큼이나 현금이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선 이웃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캐네디언들은 대체로 정이 풍부하다. 이런 광경을 마주하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 이들의 국민적 정서이다. 비록 현실적인 제약 속에 아이들의 핫코코는 많이 팔리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 작은 천막을 향해 지나가는 이웃들이 보내는 응원의 마음만큼은 예전과 다름없이 따뜻했을 것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