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했던 친구 아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 후 몇 년간의 꾸준한 항암 치료는 물론 자신과의 싸움 끝에 유방암 완치 판정이라는 기적을 가져왔다. 그러나, 기적의 효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방암 완치 판정 후 7년째를 접어들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진통에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죄송합니다. 환자분의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환자와 그 가족은 의사 선생님의 침통한 말 한마디가 무슨 의미를 둔 말인지 직감적으로 와닿는 것이 있었다.
"환자는 안타깝게도 이미 암세포가 뇌까지 전이된 상태라 더 이상 의학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줄기 희망마저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환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죽음을 평온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호스피스 병원이 전부였다.
친구 아내는 그날 오후 병원 퇴원 절차를 끝내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떠났다.
"아내가 오늘 호스피스 병원으로 떠난다"
의사 선생님의 사형선고를 받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떠나기 전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 내용이다. 퇴근을 서둘러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왔다. 고속도로는 입구부터 극심한 정체가 시작되었다. 차량에 탑승한 저 많은 사람들이 오늘따라 나와 비슷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동병상련이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잠시 해 보게 된다. 친구 아내에게 마지막 선물이 무엇이 있을까, 한참의 고민 끝에 홍삼원이라는 건강식품을 준비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환자에게는 필요한 것은 보호자의 건강일 수 있다는 생각을 찾아냈다.
잡념을 싣고 달려온 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목적지 가까운 시골 농촌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농촌 마을 풍경은 암혹의 세상과 같았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일찍부터 늦가을의 깊숙한 밤을 맞이한 까닭이었다. 차가 멈추어선 순간, 네이비게이션은 남은 목적지를 재촉한다. 마을을 지나 비좁은 농로길로 접어들었다. 비탈진 야산을 경계로 단층의 아담한 크기의 건물이 보인다. 마치 기도원 같은 분위기가 맞을법한 분위기이다. 공터 앞에 차가 멈추어 섰다. 주차장 형식을 갖추지 않은 공터를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주차장에는 몇 대 안 되는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대충 구획선 없는 자율 주차를 끝내고 차에서 내렸다.
늦가을 스산한 바람이 차갑기만 하다. 마을 입구부터 줄곧 전조등 불빛에 의존해 왔다. 병원 현관 처마 끝에 백열전구 하나가 입구의 존재감을 알리는 유일한 불빛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비 형식을 생략한 원형 모양의 마룻바닥이다. 바닥 위에는 의자나 식탁을 찾아볼 수 없다. 전형적인 공연 무대의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렇다고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다. 마루 위에 멍석만 깔아 놓으면 시골 앞마당과 다를 것 없는 소박함이 묻어 있다. 일종의 환자들의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장소인 듯하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바닥에 편한 자세로 앉아 찬송가를 열창하고 있다. 여성의 표정이 비교적 밝아 보이고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난다. 몇몇 환자는 여성의 찬송가에 맞추어 잔잔한 몸의 율동과 함께 손뼉을 치면 환호한다. 중년 여성은 오 년 전 일주일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고 생을 정리하기 위해 이곳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한다.
친구 아내가 머물고 있는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인기척 없이 불쑥 병실로 들어섰다. 친구 아내는 침대에 누워 영혼 없는 시선으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동안 병세로 몰골이 많이 상해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머리에는 띠를 두르고 있다. 얼굴은 뽀얗고 고운 새색시를 닮았다.
"안녕하세요. 재수 씨! 오랜만이지요?"
친구 아내는 순간 인사를 외면하고 되돌아 눕는다. 뜻하지 않은 돌발적인 행동에 친구는 난감한 표정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외부인 방문이 심적인 부담감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친구 아내 불쑥 남편에게 공격적인 화를 낸다. 누워있는 침대가 불편하다고 이유이다. 침대의 높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높이를 조절하는 순간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움직임이 생겨났다.
" 당신은 왜 그리도 매사에 조심성이 없어"
예민하게 과잉 반응을 하며 버럭 화를 낸다. 대부분 죽음이 가까워 오면 제일 가까운 사람부터 정을 떼기 위해 이유 없는 행동을 한다고 한다. 오늘도 가족에게 유사한 행동에 가족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호스피스 병문안은 사실 오래 머물기에는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곳이다. 환자와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환자와 생애 마지막 작별 인사임을 알면서도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도망쳐 나오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늦은 밤, 주변이 온통 고요하다. 작은 숨소리까지 시끄러움의 소음으로 밀려든다. 하늘을 올려다보려다 시선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 관심 있는 시선으로 들여다보니 나뭇가지 위에 잎새 하나가 사력을 다해 생의 시간을 붙잡고 있다.
"아, 저것이 생이고, 집착이구나, "
지금 저 모습이 친구 아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을 가지고 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낙엽의 절규가 아우성치고 있다.
오랜만에 긴장했던 탓 때문일까, 피로감이 몰려온다. 눈을 감는 순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전화 벨소리에 잠을 깼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어 벽에 걸린 시계를 주시한다. 새벽 3시를 지나가고 있다. 주로 새벽에 전화가 걸려오면 가슴이 덜컹된다. 희망의 소식보다는 절망적이고 불길한 소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죽었어"
오늘 새벽에 걸려온 전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구 전화였다. 목소리는 침착했다. 친구 아내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하룻밤도 넘기지 못하고 끝내는 절망적인 삶의 기록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친구는 사형 사고의 판정을 받은 이후 아내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것 같다.
3일간의 애도와 조문이라는 장례식 예절이 끝났다. 친구 아내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장례식이 끝나는 날까지 친구 모두는 장례식장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자리를 지켜왔다. 장례예식을 끝내고 화장터로 향했다. 을씨년스러운 늦가을이 이내 참고 견디어 낸 슬픔을 토해내고 만다. 고인을 떠나보내기 위한 마지막 순간까지 화장터는 분주하기만 하다. 어느 학자는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선택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생의 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면 살아왔다. 하지만, 죽음 앞에는 예외 없이 선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선택이기보다는 운명이라고 불렀다. 탄생의 순간 이미 죽음을 예약받았다고 말들을 한다. 예약된 죽음을 안고 태어났으니 그 예약은 신의 영역에 맡길 수 밖에는 없는 존엄한 것이다. 친구 아내의 영정사진과 함께 관이 화장터 대기실로 운구되었다. 화장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고인의 관이라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마지막이다.
친구에게는 늦둥이 7살 된 아들 있다. 아들은 엄마의 시신이 안치된 관 주 위를 연신 맴돌면서 웃고 장난치기에 여념이 없다. 주위 사람들은 철 모르는 어린애의 행동에 매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어린 마음에는 동화 같은 세상이 존재한 것은 아닐까, 엄마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불사조 같은 신화를 믿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저 아이의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나이 11살 때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외출에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창백한 얼굴로 바삐 돌아오신 아버지는 대문이 열리는 기회조차도 주지 않으시고 통증을 호소하셨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해 가셨다. 집을 떠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새벽 주검으로 집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그것이 11살 어린아이는 아버지와의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안방 아랫목에 나무판자를 깔고 그 위에 아버지 시신을 누위고 짙은 노란색 카시미론 이불로 아버지 몸 전체를 덮어 씌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머니 절규의 통곡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을까, 아버지가 누워 계신 시신 옆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서울에서 내려온 누나와 형의 통곡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 나이 46세, 젊은 나이에 어린 자식을 내버려 두고 비정하게 세상을 훌쩍 떠나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어머니는 아버지 시신을 덮었던 짙은 노란색 카시미론 이불을 깨끗이 빨아 가족의 이불로 다시 사용하셨다. 그때 나는 처음 아버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가 덮고 있던 이불을 덮는 순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왜 아버지의 시신을 덮었던 이불을 버리지 않으셨을까, 버리기에 아까운 생활의 빈곤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의 흔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은 아니셨을까,
친구 아내의 화장터 예식까지 완전히 끝이 났다. 그 대가로 마지막으로 유골함이 친구에게 전달되었다. 죽은 이의 유산 중 유일하게도 유골함이 전부였다. 나는 지금까지 무수한 장례식을 경험했다. 그리고 또 선택이 없는 무수한 어떤 장례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