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캐리어를 열어 짐을 챙기는 순간부터
여행의 시작, 캐리어를 열어 짐을 싸는 순간부터
여행은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되지만, 마음속의 여행은 짐을 싸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나는 늘 여행 날짜를 정하면 출발일까지 한참 기간이 남아 있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서둘러 짐을 꾸리곤 했다. 이런 습관은 가족들에게 종종 불편함을 주었지만, 나에게는 준비를 마쳐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조금 다르다.
“아빠, 짐 안 싸요?”
작은 아들이 출발 하루 전에도 캐리어를 싸지 않은 나를 보며 의아해 보였나 보다. 예전 같았으면 일주일 전부터 짐 싸는 준비했을 텐데,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여유를 부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걸까? 이번 여행 준비를 보며 나조차도 스스로 의아스럽다.
아내 또한 이번에는 다소 느긋한 태도를 보인다. 평소 같았으면 하루 전까지 철저히 준비를 마쳤을 텐데, 아내도 필요 최소한의 물품만 준비하며 여유를 보였다. 사실, 이번 여행은 가져갈 물품이 많지 않아 준비가 간단하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필수품만 챙기면 되는 간소한 준비가 오히려 마음을 가볍게 했다.
짐을 꾸리며 가장 신경 쓴 것은 여권, 신분증, 신용카드, 국제운전면허증 같은 필수품이었다. 특히 유로화는 아들이 이전에 밴쿠버에 왔을 때, 이번 여행을 위해 이탈리아 현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직접 건네준 돈을 환전한 것이다. 아들의 배려로 준비된 유로화는 캐리어 속에 가장 먼저 자리 잡았다.
속옷도 날짜 수만큼 챙기라는 아내의 조언에 반쯤 동의하며 절반으로 줄였다. 옷은 최대한 부피를 줄이기 위해 두꺼운 패딩 대신 경량 패딩과 바지만 챙기기로 했다. 겨울철 특유의 부피감 때문에 신중히 선택한 짐들은 작고 가벼운 캐리어 하나로 간소화되었다.
또한, 이번 여행에서는 우리 부부가 이틀 동안 아들 없이 스스로 여행지와 숙소를 찾아야 한다. ‘국제 고아’가 되지 않기 위해 지형과 교통 정보를 미리 익히며 시뮬레이션처럼 예행연습을 했다. 준비 과정이 시험 준비하는 학생 같은 느낌에 학창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행의 설렘은 준비 과정에서도 느껴진다. 캐리어를 꾸리며 떠올리는 여행지의 풍경, 그리고 그곳에서의 추억은 이미 시작된 여행의 일부다. 짐 정리를 마치고 나니, 이제 정말 출발 준비가 끝났다.
분주함과 여유 사이에서, 여행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짐 정리를 마무리 짓고, 아들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행 중간에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갈 계획이라 공연 입장 시 드레스 코드가 있다며 남방이나 코트를 챙기라는 내용이었다. 캐리어에 여유 공간이 부족해 고민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남방 한 벌만 추가하기로 했다.
이제 모든 짐 정리가 끝났다. 필요한 것들은 다 챙겼고,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끝났다는 생각에 설렘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