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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Nov 23. 2023

지금, 살아가고 계시나요?VS 죽어가고 계시나요?

어느 ADHD 국어 강사의, (어른) 아이들을 위한 귀띔

22.04.06


어떤 '깨달음'에 대하여

영국의 시인 밀턴의 장편 서사시 '실낙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혜다.
그 이상은 거품이다.
신은 부사를 사랑한다.
얼마나 좋은가가 아니라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해 배철현 작가의 에세이 '정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나를 잘 대접하는가? 나는 제삼자가 되어 나의 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가? 나는 수많은 편린으로 이루어질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명사에 집착할 것인가, 아니면 부사를 대접할 것인가?"

이 에세이를 읽은 것은 몇 개월 전인데,
오늘 갑자기 이 구절이 생각나면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

감히 평하건대 내 삶은 30대 초반까지는 온통 '버티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할 틈이 없이 난 치열하게 버티면서 지내왔다.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여정으로 삶을 정의할 때, '살아가고 있는지' VS '죽어가고 있는지' 중에서 난 완벽하게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평범하게 하루라도 살아보는 것', '고요히 사는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챌린지 중 하나였던 20대 후반에, 끝없는 안 좋은 일들로 직장도 많이 옮겼고, 늘 최저임금을 받으며, 고된 일을 하면서 몸도 많이 망가져있었다. 대중교통에서 10분 서있는 것이 힘들어서, 앉아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첫차를 타며 왕복 5시간의 직장을 출근하곤 했다.

당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막연하게, '내'가 '나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고 매일 생각했었다. 딱히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늘 나는 내가 미래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미래에 무엇'에만 집중하는가?
나는 왜 '오늘의 나'를 위하고 아껴주지 않는가?
'무엇'을 할지 당장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할지부텨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실낙원의 한 구절처럼, 나는 삶에서 '명사'가 아닌 '부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십수 년의 방황 끝에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어느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자연스럽게 내 안에 스며들듯이 자리 잡았다.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첫 큰 깨달음이었다.

사실 나는 타인의 평가와 관심에 큰 관심이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의 평가이다. 난 내가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일이 있다면, 누가 보든 안 보든 간에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 든 간에 그것을 끝내놓고 퇴근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의 평가가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강사생활 하면서 은근히 티 내며 생색내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

아이들에게도 강조한다. 공부의 양에 압도되지 말 것. 분량에 너의 시간을 맞추지 말고, 너의 시간에 분량을 맞추는 것이라고. 늘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몇 문제'를 풀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풀었는지라고. 그러나 그게 쉽지 않음도 잘 안다. 10대 아이들에게 공부란 너무 큰 챌린지며, 인생의 큰 숙제일 테니. 내 역할은 너희들이 그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옆에서 든든한 러닝메이트가 돼주는 것.

PS. 아무도 안 볼 줄 알았던 사소한 나의 업무 습관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무도 안 보고 있을 것 같지만, 누군가는 보고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지켜보고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이 정도 나이가 되니 보이는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너의 노력이.

PS. 이 책을 조금이라도 빨리 읽었다면 삶이 조금 쉬웠을까, 조금 빨랐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책은 '알 수 있게'는 해주어도 '깨닫게' 해줄 수는 없단다. 그렇지만 너무 좋은 에세이야. 고등학생들에겐 쪼곰 어려워도 언젠가는 읽길 추천해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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