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시인 밀턴의 장편 서사시 '실낙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혜다. 그 이상은 거품이다. 신은 부사를 사랑한다. 얼마나 좋은가가 아니라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해 배철현 작가의 에세이 '정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나를 잘 대접하는가? 나는 제삼자가 되어 나의 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가? 나는 수많은 편린으로 이루어질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명사에 집착할 것인가, 아니면 부사를 대접할 것인가?"
이 에세이를 읽은 것은 몇 개월 전인데, 오늘 갑자기 이 구절이 생각나면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
감히 평하건대 내 삶은 30대 초반까지는 온통 '버티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할 틈이 없이 난 치열하게 버티면서 지내왔다.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여정으로 삶을 정의할 때, '살아가고 있는지' VS '죽어가고 있는지' 중에서 난 완벽하게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평범하게 하루라도 살아보는 것', '고요히 사는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챌린지 중 하나였던 20대 후반에, 끝없는 안 좋은 일들로 직장도 많이 옮겼고, 늘 최저임금을 받으며, 고된 일을 하면서 몸도 많이 망가져있었다. 대중교통에서 10분 서있는 것이 힘들어서, 앉아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첫차를 타며 왕복 5시간의 직장을 출근하곤 했다.
당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막연하게, '내'가 '나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고 매일 생각했었다. 딱히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늘 나는 내가 미래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미래에 무엇'에만 집중하는가? 나는 왜 '오늘의 나'를 위하고 아껴주지 않는가? '무엇'을 할지 당장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할지부텨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실낙원의 한 구절처럼, 나는 삶에서 '명사'가 아닌 '부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십수 년의 방황 끝에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어느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자연스럽게 내 안에 스며들듯이 자리 잡았다.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첫 큰 깨달음이었다.
사실 나는 타인의 평가와 관심에 큰 관심이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의 평가이다. 난 내가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일이 있다면, 누가 보든 안 보든 간에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 든 간에 그것을 끝내놓고 퇴근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의 평가가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강사생활 하면서 은근히 티 내며 생색내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
아이들에게도 강조한다. 공부의 양에 압도되지 말 것. 분량에 너의 시간을 맞추지 말고, 너의 시간에 분량을 맞추는 것이라고. 늘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몇 문제'를 풀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풀었는지라고. 그러나 그게 쉽지 않음도 잘 안다. 10대 아이들에게 공부란 너무 큰 챌린지며, 인생의 큰 숙제일 테니. 내 역할은 너희들이 그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옆에서 든든한 러닝메이트가 돼주는 것.
PS. 아무도 안 볼 줄 알았던 사소한 나의 업무 습관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무도 안 보고 있을 것 같지만, 누군가는 보고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지켜보고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이 정도 나이가 되니 보이는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너의 노력이.
PS. 이 책을 조금이라도 빨리 읽었다면 삶이 조금 쉬웠을까, 조금 빨랐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책은 '알 수 있게'는 해주어도 '깨닫게' 해줄 수는 없단다. 그렇지만 너무 좋은 에세이야. 고등학생들에겐 쪼곰 어려워도 언젠가는 읽길 추천해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