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으로 사는 40대를 '가장' 사랑해 주세요.
"썬~...." 꿈속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썬~...." 또 한 번 부른다.
"썬~, 빨리~!"
잉? 꿈이 아닌가? 꿈인 줄 알았는데, 남편이 나를 부르는 소리다. 나는 침대에서 후다닥 뛰어나갔다. 이미 출근했을 시간인데 남편은 무슨 일인지 집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남편은 머리와 옷에 뭔가가 잔뜩 묻은 채 처참한 광경으로 현관에 서 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욕실로 들어가는 남편을 따라가며 물었다. 그러면서 남편을 차근히 살펴보니 머리, 윗옷, 바지, 메고 있던 가방에까지 뭔가가 엄청나게 묻어있다. 남편은 옷을 주섬주섬 벗어제끼며 투덜대듯 말한다.
아니, 버스 기다리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뭐가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거야,
비가 오나 했는데 새똥이었어!
그렇다. 남편의 머리와 옷에 묻은 것은 바로 '새똥'이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새똥'이라 함은 그냥 길바닥이나 차에 '똑!' 하고 떨어지는 그런 거 아닌가. 어떻게 이리 무자비하게 남편의 몸 모든 곳에 묻을 수 있을까? 남편의 표현대로 정말 '후두둑!!' 하고 떨어진 모양새다. 이 정도면 거의 테러 수준의 똥 투척이다.
욕실에서 몸을 씻으며 "으~, 으~더러워!" 연거푸 내지르는 남편의 탄성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밖에서 들으면서 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편이 '새똥'을 맞은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똥을 싸제 낀 그 새는 지금 얼마나 시원할까, 진정 한 마리가 이 많은 양을 쌌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 상황이 너무나 웃겼다.
남편이 씻는 동안 새똥 묻은 옷을 안방 욕실로 가져가 과탄산소다를 푼 뜨거운 물에 담가놨다. 과탄산소다로 소독을 좀 해야지, 왠지 새똥 묻은 옷은 그냥 빨면 안 될 것 같았다.
다 씻고 나온 남편이 말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새 똥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나게 쏟아질 수 있느냔 말이야~ 정류장에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안타깝게 쳐다봤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새똥을 맞다니..."
40년 넘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우가 처음인지라 남편은 새똥 맞은 이야기를 하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계속 투덜댔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사에는 조금 늦게 출근하겠다고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이 상황을 다 지켜보던 딸이 처량하게 아빠를 쳐다보며 말한다.
- 아빠, 새똥 맞아서 회사 늦게 간다고 문자 보내는 거지?
- 응, 맞아. 아빠 ㅇㅇ이 학교 가는 것보다 늦게 회사 갈 거야.
- 근데 아빠 새똥 맞은 거 너무 웃기다. 하하하하하
딸이 깔깔대며 웃는다. 이렇게 남편은 '새똥'으로 아침부터 가족에게 큰 웃음을 줬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별일이 다 있어. 그렇지? 새똥 맞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그만큼 오빠는 특별한 거야. 그러니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이런 재밌는 일이 또 어딨겠어~! 그러니 좋게 좋게 생각해."
물론 새똥 맞았다고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건 억지 일 수 있지만, 그냥 그렇게 남편을 위로했다.
사실 남편은 요즘 이직을 준비 중이다. 전략부문의 팀장으로 있으면서 집에 11시가 다 돼서야 들어오고, 작년엔 여름휴가도 못 갈 정도로 바쁘고 힘들었지만 하고 있는 일을 재밌어했다. 그러나 회사는 냉정했고, 남편이 생각한 것 만큼의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영업직부터 시작하여 본사의 팀장이 되기까지 한 회사에 20년간 다니면서 매 순간 진심으로 일했지만, 최근 새로 발령 난 팀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아 회사 가는 것을 매일 힘들어하고 있다. 아무리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한들 흔히 말하는 남편의 나이가 딱 사오정인지라 아무래도 더 이상의 회사 생활은 불안불안했다.
20대가 꿈꾸는 40대는,
경제적 안정을 이루며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살 것이라 기대하겠지만
막상 닥쳐보니 현실은, 제2의 사춘기마냥 제일 불안정한 나이임이 분명했다.
맞지도 않는 일을 하며 버티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하는 남편.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며, 자신이 하고 싶은 직무를 찾아 이직을 하겠다고 했다. 새벽까지 본인이 들어가고 싶은 회사를 공부하고 그 회사의 입맛에 맞게 끔 여기저기 이력서를 쓰고 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생각만큼 이직이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 기운 없이 일찍 들어오는 남편을 보면 아내로서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차라리 매일 늦게 오는 남편을 타박하던 지난날이 나았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에게 이번 '새똥' 사건은 참 재밌는 에피소드라 생각한다.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한 번쯤은 황당하여도 이렇게 웃어넘기고 가라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회사에서 남편이 이렇게 된 상황 역시 분명 좋은 일로 이끌어가실 '전화위복'의 큰 그림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몇 년 남지도 않았을 회사에 그냥 저냥 다니며 버티는 것 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남은 몇십 년을 도모하며 당당한 40대를 살아가려는 남편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다시 웃을 날이 있을 거라고, 또한 이번 일이 지나가면 더 성숙한 40대가 될 것이라 그렇게 남편을 응원하고 있다.
가장(家長)으로 사는 40대는,
가장 힘들답니다.
그러니 가장 아껴주고 사랑해 주세요.
그럼 더욱 행복한 가장(家長)이 될 테니.
by. 써니
덧붙이는 말.
글의 메인 사진은 남편이 새똥을 맞고 들어 온 날, 이 에피소드를 써야겠다 맘을 먹고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베란다 창에 날아든 비둘기를 찍은 거랍니다. 상황에 맞춰 날아든 비둘기가 신기하여 남편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나에게 똥을 싸제 낀 그 비둘기 같아!' 라며 자꾸 억지를 부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