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필요해
어제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한 남자 친구가 술에 취해서 "너는 멋진 친구야!"라고 했다.
어렸을 때는 여자 아이들만 놀다가 초등학교도 졸업 안 하고 서울에 공부한다고 가서 남자아이들하고는 놀아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막 대학생이 되어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갔는데 여자 친구들은 없고 동창 남자아이 두 명이 동네에 있었다. 그래서 방학 때라 같이 몇 번 바닷가로 놀려 갔었다. 그 이후로 잘 만나지 못하다가 이제 흰머리가 하얗게 되어 동창 모임에서 가끔 보았다. 그 친구는 옛날을 회상하며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꺼낸 것 같았다. 취담이지만 기분은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그 친구의 이름을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벌써 치매 초기증상인가 생각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내가 만일 인생을 다시 산다면>하는 책을 찾아보았다. 내가 읽고 나 두었는지 알았는데 그 책이 너무 좋아서 아마 선물했는지 아무리 찾아도 책장에 없었다. 이번을 기회로 도서관처럼 글자 순서로 책장 정리를 해야겠다.
어쩔 수 없이 인터넷 서점에서 그 책을 찾아 서문을 읽어 보았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파킨슨병이었다. 손발이 떨리는 증상으로 치매하고는 달랐다. 유튜브에서도 어느 의사분이 파킨슨병에 대해 알려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니 치매는 없을 거야'했는데 지식인들도 걸리는 파킨슨병도 치매인가 깜짝 놀라 찾아보았다. 동창회 모임에서 그 친구 이름을 듣고도 기억이 안 나서 내가 치매 초기 인가 하며 치매초기자가진단을 살펴보기도 했다.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오죽 답답하면 친구에게 전화해서 그 친구 이름을 물어보려고까지 했다. 그래도 책을 읽다 이름 뒤 한자는 생각이 났는데 가운데 글자는 글을 쓰다 보니 알아냈다. 책 찾느라 날리, 치매가 아니가 서치하고 전화까지 할 뻔한 정신없는 아침이었다.
한시름 놓고 다음 친구를 소개해야겠다. 고향 소꿉친구는 당연히 여자친구였지만 나는 유독 길 건너 남자 친구와 잘 놀았다. 그 남자아이는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고 너무 착했다. 나는 착한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남편도 너무 착해서 만났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남편을 잘못 만났다고 여러 번 했다. 나도 웃으면서 나쁜 남자라고 하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다음에는 진실을 얘기해 줘야겠다.
어쨌든 그 친구 하고는 집 앞 제밤(구실잣밤나무) 나무에서 같이 나무를 타며 놀았다. 그러다가 누가 나무를 잘 타는지 시합을 하게 되었다. 나도 말괄량이로 나무를 잘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데 욕심을 내다가 내가 떨어졌다.
제주에는 돌멩이가 많아서 그랬겠지만 하필이면 떨어진 바닥에 뾰족한 돌멩이에 떨어져 머리에서 피가 났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집에 들어와 소독하고 붕대로 싸매고 참외를 깎아주며 나를 달랬다. 그렇게 나는 내성적이면서도 말괄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남자아이들과 이야기를 트지 못했었다.
그래도 어제는 킹카들이 나오지 않아 그동안 말을 나누지 못한 친구들과 조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인기 있는 남자친구들은 항상 내 주변에서 술을 마시다가 다른 친구들에게 가서 또 말을 하다가 했다. 어제는 그런 친구가 없으니 내가 다른 친구 자리에 가면서 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했고, 나랑 나무 타던 옛날이야기도 못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내가 내성적이고 무심한 성격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나무에서 떨어졌던 사건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그 친구는 나무 사건보다 내가 서둘러 결혼하면서 남편을 잘못 만났다고만 했다. 그리고 왜 그림을 그리지 않냐고 했다. 나는 복잡한 그림대신 글을 쓴다고 했다. 남편도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는 아내를 로망으로 생각했지만 깔끔한 것을 좋아해서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친구와 어떻게 지내는지를 이야기하다 보니 어렸을 적 이야기는 잘 못했다.
오늘 아침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으니 치매는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 않고 이제는 남자 친구들과도 말을 트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재미있게 보내야겠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하루아침에 내 성격이 변하지 않지만 그 추억을 말하며 즐겁게 지내는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