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다시 눈을 뜨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교차하는 시기,
낀 세대로 살아온 나는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을 초기에 배우며
꽤 오랜 시간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웹디자이너로 일해왔다.
하지만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졌고,
어릴 적 꿈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늘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나를 건드렸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듣게 된 일러스트 수업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이 조용히 깨어났다.
그 마음은 더는 외면할 수 없었고,
2002년 월드컵의 열기 한가운데에서
나는 다시 그림을 그려보기로 결심했다.
10년 만에 잡은 펜은
설렘보다는 좌절에 가까웠다.
손은 굳었고, 마음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다 '그리고 싶은 문장을 그려보는' 수업에서
좋아하는 가수 토이의 가사를 그림으로 옮겨보며
처음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림 안에 생각과 감정을 녹여낼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나의 그림으로 말하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페인팅 기법을 배우고, 그림책 수업에 참여했다.
운 좋게 몇 권의 그림책에 그림을 그릴 기회도 있었지만,
작업에 대한 아쉬움과
아직 꺼내지 못한 내 이야기들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결혼과 육아, 생계를 위해
다양한 핸드메이드 작업을 병행하며
어느새 N잡러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 아이패드라는 ‘요물’을 만나게 되었다.
작업실도, 재료도, 많은 시간이 없어도
어디서든 그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잊고 지냈던 설렘을 다시 불러왔다.
어릴 적 여름방학,
시골집에서 보냈던 시간이 내 감성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아이에게도 그런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시골집 대신 선택한 제주에서
아이와 보내는 일상을 담은 작업, **<에잇제주>**를 통해
나는 다시금 자연의 빛, 일상의 감동,
그리고 잊고 있던 그림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 한 켠 비어 있던 자리가 조금씩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하루 속에서
빛이 스미는 순간들과
스쳐가는 장면들을 조용히 관찰한다.
내 마음이 닿는 대로
소소한 이야기들을 마음에 담아 그려내며,
이제야 그림이 주는 위안과
잔잔히 마음을 흔드는 빛의 잔영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
메모리 속 이야기들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