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건드린 장르가 없는데 그 결과는...?
뭉툭하던 바람이 칼처럼 느껴지고 자꾸만 몸을 움츠리게 되는 계절이 다가왔다. 갈수록 격렬하게 날뛰는 일교차가 당차게 알린다. 끝날 것 같지 않던 2020년도 이제 몇달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 코로나. 코로나 때문에 올해 농사 다 망했어.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예외 없이 1년 농사 망친 나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콕 생활을 하며 꽤 많은 MBC 드라마를 봤다. 나의 1년 농사는 변변찮았었는데 MBC 드라마 농사는 과연 어땠을까.
MBC는 이번 상반기 시트콤, 로맨스 코미디, 정통멜로, SF, 추리 장르물까지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없다. 안타깝게도 그런 것 치고 시청률이 좋지는 못했다. 도대체 어떤 점이 아쉬웠기에 섭섭한 결과가 나온 것인지 MBC 상반기 9시 30분 월화, 수목, 금 드라마 모두 모아 총결산을 해보려고 한다.
‘그 남자의 기억법’, ‘365: 운명을 거스르는 1년’ 등으로 호평을 얻은 드라마들을 이어 ‘꼰대인턴’으로 상반기가 마무리됐다. 시트콤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배우 ‘박해진’과 믿고 보는 원로 배우 ‘김응수’가 투톱 주연을 맡았다. 꼰대인턴은 세상에 다시 없을 꼰대 ‘김응수’가 시니어 인턴으로 ‘박해진’의 하사로 재취업하며 벌어지는 갑을 체인지 복수극이다. 신선한 조합과 신선한 내용인 만큼 시청률은 가장 높았다.
‘라떼라떼라떼는 말이야...’ 하는 트로트 OST도 인기를 끌었다. 단지 꼰대를 공격하고 사회의 악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 꼰대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세대 간 이해의 폭을 넓히자는 메시지도 전달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그래. 저런 꼰대 상사들 때문에 너무 힘들다.’, 기성 세대에게는 ‘나이 먹고 직장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등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서로의 고충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드라마였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자체는 다소 과장된 시트콤의 형식을 가졌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현실적이었기에 가능했다. 다만 ‘과장된’ 느낌이 기존의 ‘하이킥 시리즈’와는 달리 비현실적으로 비치는 면도 있었기에 젋은 세대의 웃음까지 사로잡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SF8’은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의 일환으로 총 8개의 SF 드라마를 모은 앤솔로지이다. 웨이브에서 선공개하고 이후 한 회차씩 매주 금요일 밤 10시에 MBC에 방영됐다. 각 드라마의 퀄리티가 매우 좋았음에도 8개 에피소드 모두 시청률이 바닥을 기었다.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건 길게 이어지는 시리즈다. 단편적으로 끝날 영상물을 불금 황금시간대에 굳이 공중파 MBC에서 봐야 할 이유는 없다. 자기 전, 또는 출퇴근 시간대에 웨이브로 보면 그만이다.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홍보 효과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편성 낭비로 느껴졌었다.
‘저녁 같이 드실래요? (일명 저같드)’에는 송승헌, 서지혜, 손나은 등 이름 날리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특히 서지혜는 ‘저같드’ 방영 직전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도도한 평양 여자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인지 서지혜가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서 보여 줄 새로운 면모에 방점을 두고 시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다소 실망스러웠다. 서지혜의 연기가 실망스러웠던 게 아니라 드라마의 설정 자체가 신선한 느낌이 없었다. ‘저녁’을 통해 남녀가 인간적 교류를 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사실 특별할 게 없다. 먹방 키워드가 안방을 장악한 지 수년이 지났으며 볼 만한 로맨스는 이미 다 봤을 정도로 많은 로맨스 드라마가 스쳐 지나갔다. 타 방송사에서는 도깨비와 인간이 사랑하고 북한에서 로맨스가 시작된다. 이런 시기에 ‘저녁’으로 로맨스가 시작되는 것은 사실 크게 흥미를 당기지 못했다.
두 드라마 모두 짧게 방영하고 끝이 난 ‘추리 장르물’이다. ‘미쓰리는 알고 있다’는 4부작, ‘십시일반’은 8부작이었다. 드라마 퀄리티는 두 드라마 모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시청률은 역시 좋지 못했다. 추리 장르물은 가볍게 보기 어렵고 호불호가 크게 갈리기 때문에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에 비해 선뜻 채널을 고정하는 시청자들이 적다. 그렇기에 입소문을 타고 고정 시청자층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두 드라마를 합쳐도 16부작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짧게 ‘스쳐 지나간’ 비운의 드라마로 기억한다.
임수향, 하석진, 지수가 주연을 맡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흔히 요즘 말로 ‘마라 맛’ 드라마였다. 형과 형의 아내, 형수를 짝사랑한 아우의 삼각관계를 그렸다. 시청자 게시판에 이게 무슨 막장이냐고 다짜고짜 욕을 하는 글도 올라왔을 정도였다. 그런데 삼각관계 설정 자체는 약과였다. 막상 드라마를 보면 삼각에서 사각, 오각까지도 관계가 뻗어 나간다. 중간중간 MSG 팍팍 친 ‘그게 하고 싶어요. 인생 망치는 거.’ 같은 대사들이 심장을 뛰게 한다. 마치 잘 쓰인 웹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자극적인 대사들이 지수의 입을 통해 다수 등장했다. 스토리의 시작도 연출도 연기도 모두 좋았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어 갈수록 길고 길게 이어지는 ‘고구마’ 구간과 고구마의 끝에 ‘사이다’를 그다지 시원하게 먹여주지 못한 결말이 뒤통수를 세게 쳤던 드라마였다. 그런데도 개인적으로는 MBC 상반기 드라마 중 가장 볼 맛 나는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겠다.
2020년이 몇 달 남지 않은 현시점, MBC에서도 올 하반기 방영 예정인 월화, 수목 드라마 딱 2개가 남았다.
두 작품 모두 MBC가 칼을 갈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먼저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믿고 보는 로코 장인 ‘유인나’와 ‘문정혁(신화 에릭)’이 주연을 맡았다. 거기에 훈훈한 비주얼의 배우 ‘임주환’까지 삼각관계를 이룰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안 될 수가 없다. 비밀 많은 두 남편과 첩보전에 휘말린 한 여자의 스릴 만점 시크릿 로맨틱 코미디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10월 21일 오후 9시 20분에 방송한다.
‘카이로스’는 대작 냄새가 물씬 난다. 연출진부터 강력하다. 연출 잘한 MBC 드라마로는 손꼽히는 ‘W’, ‘한 번 더 해피엔딩’ 등을 연출한 박승우 PD와 ‘근로감독관 조장풍’을 맡았던 성치욱 PD가 공동연출을 맡았다. 유괴된 어린 딸을 되찾아야 하는 미래의 남자 서진과 잃어버린 엄마를 구해야 하는 과거의 여자 애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가로질러" 고군분투하는 타임 크로싱 스릴러다. 시간 여행 판타지 드라마인 셈이다. 신성록, 이세영, 안보현, 남규리, 강승윤 등이 출연한다. ‘카이로스’는 10월 26일 오후 9시 20분에 첫방송한다.
하반기가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장르를 모두 시도해본 것치고 객관적 성과는 아쉬웠다고 할 수 있다. MBC 드라마가 한 자릿수 시청률은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장르의 시도도 좋지만, 그 전에 누가 봐도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각본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아직 2020년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므로 그 끝을 장식할 두 드라마가 재미있고 완성도 높았으면 한다. 캐스팅 측면에서는 ‘나를 사랑한 스파이’가, 스케일 측면에서는 ‘카이로스’가 기대된다. MBC가 퀄리티 좋은 두 드라마를 양옆에 끼고 2020년을 의기양양하게 마무리하길!